[글 008] 백야 [白夜] | 콘팀 슨로이 + 블루펄스
큰 강을 국경으로 삼은 나라가 있었다.
강줄기는 부드럽게 땅을 감싸면서 밖으로 흐르고 있었고, 나라 안 모든 국민들의 생명줄이었다. 넓고 깊게 흘러 마르지 않는 강은 그들의 자랑이었고, 생활의 일부였으며,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였다. 언제나 옅은 안개에 감싸인 햇빛이 작은 보석처럼 부서져 강의 수면에 떨어지면 화려하게 빛났다. 마치 강 전체에서 하얀 빛이 나는 것 같은 장관은 옅은 해가 떠있는 동안 볼 수 있는 작은 선물이었다. 고담에 밤이 찾아와 어둠이 깊어지면 넓은 강은 달과 별을 한없이 수놓은 듯, 한 폭의 비단같이 새까만 묵색의 은은한 빛을 내면서 한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언제나처럼 마르지 않는 강은 은은한 음악소리를 내면서 궁을 스쳐지나가곤 했다.
항상 한 겹 물에 잠긴 것처럼 조용하던 현무 궁이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웠다. 밤의 어둠이 내려앉은 것처럼 어둠 속에 서있는 별채는 현무 궁 내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궁의 사람들 까지 모여 밤이 늦도록 북적거렸다. 보통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은 현무 쪽 가신들이었고, 입을 다물거나 조용히 반대하는 쪽은 백호와 청룡가문 이었다. 브루스의 바로 옆에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있던 가주가 슬쩍 눈을 들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가장 많은 말을 해야 할 위치인 현무궁의 가주 브루스 웨인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브루스의 오른쪽에 놓인 매끄러운 찻잔에 맺혀있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또르륵 흘러내렸다. 뜨거운 차가 한 김이 넘도록 방치되어 식어갔다. 양쪽에서 분분한 의견을 조용히 듣던 브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회의실 안엔 기묘한 긴장이 천천히 쌓여만 갔다. 아무리 서로 논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은 가주의 권한이었다. 좀처럼 말을 잇지 않는 가주를 바라보던 신하가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
“정식 후계자도 없는 마당에 양자를 셋이나 들이시다니요. 온 거리의 주정뱅이들이 현무 궁에 대한 없는 소문을 지어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정도 되면 심각한 일입니다.”
“아니, 그래서 이쪽에서 대안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그건 대안이 될 수 없지요. 궁의 다음 주인이 베타라뇨.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친다면 셋째 아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를 이을 가주는 알파여야 마땅합니다. 요즘에야 오메가 가주가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4대 가문은 그럴 수 없지요. 암요.”
“답답한 소리 그만 좀 하시오!”
“그러는 자헌대부야말로 이 궁의 법도를 깨뜨릴 셈이십니까. 답답한 소리라뇨!”
“그러니까 내말은!”
또다시 제멋대로 떠드는 목소리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브루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을 빠르게 잡아낸 청룡가문 가주가 잠시 회의를 멈출 것을 명령했다. 비록 이 곳이 현무 궁내라고 하더라도 각 방위의 가주들은 그들의 권위에 준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적당히 눈치를 살피던 백호 가문 쪽이 먼저 일어섰다.
“잠시 다들 바람을 좀 마신다음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요.”
“…흐음,”
“어차피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주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회의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저들 좋을 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신들을 놔둔 채 가주들은 천천히 후원으로 향했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랐고, 후계자의 자격에 대해 이해하는 것 또한 제각각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무궁의 후계자를 정하는 자리에 조금 특이한 아이가 후보로 올라와 있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온갖 추측과 소문을 만들어냈다. 주막에서는 그런 소문을 심심풀이 안주로 사용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제법 그럴싸하게 살이 붙기 시작했다. 소문 중 몇 개는 현무궁의 현 주인인 브루스 웨인을 향하기도 했다. 때로는 후계자 후보에 오른 아들들에게로 향하기도 했다. 높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항상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하…….”
“이럴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심각한 걸?”
“…….”
“언제나 이런 구설수는 오르기 마련이니까.”
“…….”
시끌시끌한 회의실을 벗어나 후원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잠자코 둘의 이야기를 듣던 브루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섰다.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흑목으로 곱게 문양을 짜넣은 복도엔 천이 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조금 맴도는가 싶더니 이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 뒤를 따르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던 친우들은 살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지금은 좀 힘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일걸세.”
“…….”
“그래. 딱히 현무궁의 피를 이은 확실한 친자도 없는 상황이니 다들 말소리가 커지는 거니까 자네도 이해를 해줘야 하네.”
“…하.”
“나이트 윙이 확실하게 발현을 했다면 한결 나았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오늘 결정을 하려 하지 말고 천천히 깊게 고민을 해보는 쪽이 좋을 것 같네.”
“나도 알고 있다네.”
“어차피 다들 할 말이 아직 많은 모양이니 천천히 머리 좀 식히고 들어가지.”
“…….”
브루스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첫째가 성인식을 치르고 둘째도 곧 성인식을 앞두는 나이가 되었는데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이상한 일이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크게 꺾인 복도를 따라 돌아가다 이내 사라졌다. 조용조용 길고 부드러운 천이 스치는 소리와 장신구들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갑옷이 잘그락 거리는 소리만 들리던 복도는 이내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여긴 조금 편하군.”
“자네는 언제나 큰 일이 있으면 여기에 오곤 했지.”
“…그런가.”
어느새 후원에 멈춰선 브루스가 흐리게 깔린 구름 사이에 보이는 달을 바라보았다. 푸른 달빛이 건물의 기둥에 묻어나올 때마다 흑송 나무에 고급스럽게 새겨진 현무 문양이 보였다 사라졌다. 금과 은을 사용해 장식한 기둥들이 다시 어둠 속에 잠겨들자 브루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가야겠네.”
“그러지.”
“주작 가문은 아직도 바깥출입을 안 한다던가?”
“그 쪽도 좀 큰 일이 있던 거 같더군. 갑자기 막둥이가 들어왔다 하던가?”
“백호 가문에서 큰일이라고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아 말도 말게나.”
“그래그래. 내 괜한 농담을 했네. 일단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세.”
다시 시작된 토론은 밤늦도록 이어졌지만 별다른 합의점을 얻어내지 못했다. 후계자를 정하는 일에 일망의 양보도 하지 않는 팽팽한 맞서기는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브루스 웨인, 그러니까 현 현무궁의 가주가 후계자의 재목으로 데리고 왔다고 하는 공식적인 아이는 세 명이었다. 하지만 모두 밖에서 현무 궁으로 들어온 아이들인지라 직접적인 피를 나누진 않았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사람들이 저리도 지리한 토론을 반복하고 있었다.
말을 하자면 길었다.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하고 회의가 파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자 잠자코 방문을 지키고 섰던 청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 서글서글하게 웃던 청년이 좀 더 비켜섰다. 가신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자 궁 안의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오는 고담의 밤은 조용히 담장을 넘어와 뜰 안을 가득 채웠다.
“안된다고 하죠?”
“…….”
“밖에 있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을 알고 있다니까요? 게다가 전 별로 그런 자리에 관심 없어요.”
“…….”
“억지로 그 자리에 올라가도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이 더 많이 생길 거고…….”
“…딕!”
“…난 지금이 제일 좋은 걸요.”
“개인 적인 일이 아닌 걸 알고 있지 않느냐.”
“물론이죠. 하지만 전 싫어요.”
“…….”
“싫어요. 브루스.”
살짝 입을 내밀어보던 청년이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다른 지역의 가주들과도 잘 아는 사인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곤 빙글 돌아 브루스의 장포를 꾹 움켜쥐었다. 아이가 제 부모를 찾는 것 같은 답지 않은 행동에 브루스가 원하는 대로 걸음을 잠시 멈추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옆에 붙어왔다. 그런 딕을 바라보던 다른 가주들이 흐뭇하게 웃음을 짓고 한걸음 물러섰다. 뭐라고 해도 브루스와 가장 오랜 시간을 지냈고, 그만큼 통하는 것도 많은 청년이었다. 항상 모든 날이 꽃 같을 수는 없기에 때때로 사이가 틀어지긴 했어도 언제나 현무궁의 테두리에 속해있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긴 했어도 언제나 마지막 도착지는 이 곳이었다.
길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푸른 달빛이 소복하게 얹혀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푸른 보석 가루가 파르르 흩날리며 주위를 맴돌다 이내 어둠속에 녹아내렸다. 갓 성인식을 치룬 청년의 몸이 탄탄하게 브루스의 팔에 붙어왔다.
나이트 윙, 딕 그레이슨.
누가 뭐라고 해도 현무궁의 첫 번째 아들인 그는 그렇게 달과 잘 어울리는 푸른 사람이었다.
한참 이리저리 브루스를 돌아보며 떠들던 청년이 눈 안에 달빛을 가득 담고 휙 돌아섰다. 호리호리한 몸매가 우아하게 회전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멈춰선 채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다른 궁의 가주 쯤 되는 지위는 누구나 어려워하는 자리였지만 적어도 딕은 아니었다. 익숙하게 다가서서 뒷머리를 살짝 긁적이다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앞으로 와르르 쏟아질 듯 흘러내려 고담의 어둠을 흠뻑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웃으며 클락을 쳐다봤을 때 푸른 눈에서 푸스스 떨어지는 달빛 조각이 검은 머리에 하나둘 내려앉아 보석처럼 빛나는 것 같았다.
“저희 쪽이 조금 시끄럽죠? 괜히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우리가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로이…아니지. 아스널을 여전하구요?”
“그래. 후계자라는 놈이 이리저리 겉돌기만 하고,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는구나.”
“다른 고민도 있으시죠? 아까 회의에서 어른들이 말하는 건 너무 귀담아 듣지 마세요. 어차피 지위를 받게 되면 아무도 함부로 말을 못 할 거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클락 자네도 이렇게 힘들었나?”
“그럴 리가.”
클락은 쓸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사실 최근까지 궁의 다음 대 주인을 정하는 데 이렇게나 큰소리가 났었던 적은 없었다. 클락이 콘을 후계자로 세웠을 때도 그랬고, 그린 애로우가 양자로 들인 아스널에게 같은 지위를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두 가문이 그러한 것처럼 적어도 사방신을 모시는 가문에서는 친자와 양자의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피가 직접 이어진 친자에게 물려주는 일이 좀 더 빈번하긴 했지만, 양자라고 해서 무조건 후계 구도에서 밀어내진 않았다.
하지만 현무 궁의 경우는 조금 복잡했다. 첫째인 딕 그레이슨은 충분히 나이가 차고 모든 면에서 똑똑하고 사려 깊어 후계자의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결점이 있다면 형질 발현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방신 가문에서만 주로 나타난다는 알파, 오메가, 그리고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지고 있는 베타 형질은 생각보다 깊고 복잡했다. 이 형질은 세력구도에 있어 친자와 양자의 핏줄의 사이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다. 특히 비슷한 또래가 많은 곳에선 베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세력 구도에서 굴러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양자를 많이 들이는 일은 적었기에 그리 큰 소리가 나지 않고 굴러갈 수 있었다.
둘째인 제이슨 토드는 알파로 착실히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이 신하들은 그를 반쯤 잊어버린 채 지냈다. 어릴 때부터 오메가의 티가 나서 궁 안을 들어온 팀 드레이크는 손위 형제가 알파란 이유로 반대를 받았다. 딕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들릴 때마다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세며 웃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신하들의 의견을 흘려 넘기는 것보다 힘든 것은 브루스의 완고한 고집이었다. 평소엔 말도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이렇게 집요한지 알 수 없었다.
‘난 널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다.’
‘싫어요. 난 그냥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생들과 지내고 싶다니까요.’
‘…딕.’
‘부탁이에요.’
브루스는 딕을 후계자로 올리고 싶은 눈치였지만 베타라는 형질로 가로막힌 벽은 너무도 높았다. 궁의 대를 이어야하는 입장에서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었다. 물론 베타와 다른 형질의 결합으로 알파나 오메가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고, 그것도 안 된다면 양자를 들이면 되는 일이었지만 신하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 듯 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하는 지리한 싸움은 서서히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제이슨이나 팀의 경우에도 모두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안 된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따져보자면 딕보다 후계자 서열이 높았다. 가주의 권한으로도 쉽사리 바꿀 수 없는 금기는 그저 세력 구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괴롭힐 뿐이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미간이 주름이 진 딕의 얼굴을 살펴보던 클락이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머리를 감싼 채 쳐다보는 시선을 뒤 한 채 클락은 오랜 친우들과 함께 가볍게 웃으며 아이보다 한발 앞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딕이 궁에 들어온 것은 현무궁을 주축으로 한 큰 축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오색 빛 물을 들인 고운 종이를 얇은 나무 살에 하나하나 겹쳐 발라 만든 등이 나무마다 열매가 열린 것처럼 화사하게 걸려있었다. 등 안에 들어있는 작은 초는 밝게 타오르며 어둠을 몰아냈다. 사람들은 등마다 작은 쪽지를 붙이며 소원을 빌었다.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오는 어둠마저 몰아낸 축제는 고담의 자랑거리였다. 먹을 것도 볼 것도 많은 곳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잡아 끄는 것은 작은 아이를 선두로 한 기예단 이었다. 화려하게 꽃과 긴 천으로 치장한 천막 사이로 언뜻 보이는 호랑이의 모습은 호기심을 끌기 충분했다.
손마다 작은 등과 꽃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관중들의 함성이 빙글빙글 뭉치며 섞여들었다. 커다란 맹수가 붙이 붙은 굴렁쇠를 한꺼번에 뛰어넘자 공연장 안으로 색색의 종이꽃과 박수소리가 한여름 낮에 내리는 비처럼 쏟아졌다. 앞발을 썩썩 핥아 내리던 호랑이가 곧바로 사육사의 다리에 고개를 부비며 고양이처럼 행동하다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은 저 높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제법 높은 곳에서 기다란 그네를 잡고 서있는 한 가족이 손을 들어 인사를 하자 아까보다 더 큰 함성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아슬아슬하게 서로 엇갈리며 그네를 옮겨 다닐 때마다 숨소리도 내지 못한 사람들이 눈으로 그들을 쫓았다. 가볍고 유연한 몸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서로 손을 잡고 크게 한번 왕복 운동을 했다. 관중들 등 뒤로 둘러친 장막이 들썩 들썩할 정도로 모두들 흥분해있었다.
마지막 가장 작은 아이가 자신의 그네를 잡았을 때 함성 소리는 비명소리로 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사고였다. 실수인지 누군가의 고의인지, 원한에 의한 복수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너도나도 비명을 질렀다. 붉은 것이 점점 번져가는 무대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작은 아이는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아이의 눈을 누군가 가리며 뒤로 돌려세웠다. 아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서 유감일세.”
“아닙니다. 저희야 말로 이렇게 신경을 써주셔서…….”
“…….”
축제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은 브루스가 나서서 재빠르게 처리했다. 현무 궁까지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축제에 놀러온 외부인들이 많았기에 관할 지역을 고루 살피는 인상을 주기위해 가주가 직접 움직인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짤막하게나마 위로의 말을 건넨 브루스가 다시 말을 잇지 않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위엄이 가득한 검은 비단으로 둘러싸인 현무궁의 가주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작은 아이에서 눈길이 멎었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하얗게 질인 얼굴에 절망이 가득 내려앉은 아이가 더 이상 울 힘도 없는지 비틀거리며 단원들에게 몸을 기댄 채 간신히 서있었다. 옷도 채 갈아입지 못했는지 소매 끝에 핏자국이 거뭇하게 말라붙어있었다. 버석버석 다 부서진 푸른 눈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그저 흘러만 가게 두었다. 파르르 떨던 속눈썹이 한번 내려앉았다 간신히 다시 푸른 눈이 보였을 때 브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흔하지 않은 흑발 벽안의 남자아이. 현무 궁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생각했다.
“…그래. 저 아이는.”
“사고를 당한 부부의 아들입니다. 저희 기예단에서 나고 자랐는데, 부모가 한번에…….”
“…….”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닐세.”
“…….”
“저 아이는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인가?”
“예? 무슨 말이신지.”
“…….”
잠자코 입을 다문 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브루스는 무엇인가 한참 고민을 하는 듯 했다. 단장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을 때 다시 한 번 낮고 단단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괜찮다면 저 아이는 내가 맡도록 하지.”
“아, 예. 원하신다면…예?”
“현무 궁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
딕이 아이를 쳐다보자 손을 붙잡고 있던 단원이 재빠르게 딕을 끌고 앞으로 다가왔다. 무릎을 꿇은 채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지 그저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푸른 눈에 언뜻 검은 비단이 스쳤다 이내 사라졌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것이고, 내 제안처럼 함께 갈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널 데리고 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
“얘, 어서 말씀을 드려야지.”
“…….”
“아가!”
“…….”
“죄송합니다. 아이가 워낙 충격이 큰지라.”
“아닐세.”
머리를 조아리는 단원을 가볍게 저지시킨 브루스는 인내심 있게 참으며 아이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천하의 브루스 웨인이 한 말 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평소에 쉽게 볼 수 있었던 현무궁의 엄격함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누구나 쉽게 반문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평민도 아닌 기예단에서 나고 자란 아이를 궁에 정식으로 들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가주를 따라온 시종장도 그 뒤를 길게 따르던 시비들도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채 궁 안에서만 생활하던 가주에겐 여러 가지 꼬리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아직도 궁 안에 정식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갑자기 해결될 줄이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이는 별 말이 없었다. 잔뜩 검은 구름이 껴서 흐려진 눈에서 간신히 쥐어짠 눈물방울이 흘러나왔다. 눈꼬리를 따라 길게 흘러내린 것이 턱에 맺혔다 똑 떨어졌다. 이해했다. 어떤 아이가 부모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 또한 그랬다. 선대의 가주였던 부모가 습격을 받아 궁에서 살해당했다. 그 이후 넓고 커다란 현무 궁엔 어린아이였단 브루스만 홀로 남아있었다. 작은 아이의 옆엔 시종장이 항상 지키고 보듬어 주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궁 안을 세차게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무서워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부모와 같았던 시종장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브루스는 좀 더 애잔함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주인을 바라보던 노련한 시종장이 빠르게 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넘겨받았다. 주름진 손이 작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주며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반대쪽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 쥐고 능숙하게 토닥여주자 표정 하나 없이 죽은 것 같던 얼굴이 일순 흔들리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왈칵 흘러나왔다. 어깨가 벌벌 떨릴 만큼 우는 아이를 보듬어 안은 시종장이 뒤로 걸어 나와 브루스의 뒤로 가서 섰다. 뒤에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브루스는 곧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이는 울음을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예.”
“그리고 이건 궁에 후계자를 보내준 사람들에게 주는 보답일세. 아마 한 두해 정도는 편하게 살 수 있을 양일 게야.”
“…….”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를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네. 당연히 해야 할 법도일 뿐이야. 자네가 기쁘게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도 마음이 불편하네.”
“그러시다면…….”
“그래. 아이는 현무의 이름으로 무사히 자랄 것이고,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네.”
“알겠습니다.”
법도에 따라 기예단 사람들에게 충분한 양의 재물을 내어준 브루스가 단장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길 재촉했다. 아이를 사는 개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궁의 후계자의 후보가 될 아이를 키워준 보답이었다. 단장이 그것을 받아들고 크게 절을 하자 브루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마차에 몸을 실었다. 길고 부드러운 검은 옷자락이 모두 마차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시종장이 아이를 마차로 올려 보냈다. 천천히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육중한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차를 따르는 긴 시종들의 행렬이 늘어졌다. 현무 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이는 계속 훌쩍거리며 뻣뻣하게 말라붙은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렇게 딕 그레이슨은 현무궁의 가주인 브루스 웨인이 직접 데려온 첫 양자가 되었다.
아마 딕이 별 일 없이 곧바로 현무궁의 기운을 받아들여 알파나 오메가로 각성을 했다면 모든 일이 평탄하게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현무 궁에 가주의 이름을 받아 들어온 친자와 양자들은 충분히 각성의 여지가 있었지만, 딕은 발현의 최적기를 이미 지난 나이였다. 게다가 부모를 잃은 마음의 상처도 심했기에 좀처럼 현무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보통 궁의 후계자들이 겪는 지독한 성장 통은 오지 않았다. 미미하게 열이 나고 며칠 앓아 누워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곤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자 딕은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별다른 성장 통을 겪지 않아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미묘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고요하던 궁 안에서 들리는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기 충분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중간 지점, 그 미묘한 경계에서 좋은 것만 습득한 아이는 낙천적인 성격이 더해지자 집안일을 하는 시종들에게 고루 인기가 많았다. 붙임성도 있고 눈치도 빨라 곧 궁 안의 생활에 적응한 딕은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딕의 웃음이 닿는 곳마다 봄이 오는 것처럼 파랗게 새순이 돋아났다. 낙천적이고 발랄한 성격은 비록 베타에 가까운 존재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시종장도 집안이 환해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딕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좀 더 자라자 딕은 곧잘 브루스의 집무실로 쳐들어가 궁이 너무 넓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집무실에 딸린 커다란 의자를 낑낑 거리며 브루스의 의자 바로 옆까지 밀고 온 아이가 그 위에 낼름 올라앉아 브루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커다란 손이 끊임없이 날렵하고 정갈한 글씨를 써내려 가는 것을 한참동안 구경을 했다.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고 그 위에 직인을 찍어 마무리 하고 곱게 말아 긴 비단 끈으로 묶었다. 서류에서 손을 떼는 브루스를 보자 딕은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제법 영악한 아이였다.
“브루스. 브루스. 내 동생은 안 만들어 줄 건가요?”
“…….”
“네?”
“…딕.”
“나 혼자 지내기엔 여기가 너무 넓어요. 동생이라던가…형이라던가. 네? 브루스.”
길게 말꼬리를 늘이던 아이가 눈을 깜박이며 브루스를 쳐다보았다. 하긴 궁 안은 아이 혼자 지내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호화롭진 않지만 단정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있는 궁은 본궁만 해도 수십 개의 방과 집무실이 있었다. 본궁을 나오면 숲과 후원 그리고 비슷비슷한 검은 기둥과 현판이 걸려있는 별궁들이 있었는데, 이곳은 아차하면 길을 잃기 충분했다. 같이 놀 또래의 아이도 없었다.
“그럼… 혹시 브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한테도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아이가 갑자기 찾아오면 동생으로 삼아도 되나요?”
“무슨 뜻이냐.”
“브루스가 날 데려온 건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면서요. 나한테도 그런 행운이 올 수 있지 않을까요?”
“…….”
“맞는 말이죠? 그렇게 해도 되나요?”
“…….”
“대답 안 해줄 건가요?”
“그러도록 해라.”
“와! 정말요? 약속 한 거죠? 무르거나 하기 없어요?”
“그래.”
의자에서 팔짝 뛰어내린 아이가 브루스의 무릎을 한껏 껴안았다. 그리곤 생글생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고급스러운 무늬를 섞어 넣은 천으로 알록달록하게 만든 옷을 입은 채 한껏 웃고 있는 얼굴이 퍽 사랑스러워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현무 궁에서 태어난 것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몸을 쭉 따라 내려가던 브루스가 슬쩍 미소를 짓다 이내 다른 장부를 펼쳐들었다. 조세 계약이니 무역 목록 장부니 하는 어려운 말이 잔뜩 써진 서류를 한참 쳐다보던 딕은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훌쩍 바람처럼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딕은 뭐든 배움에 대한 욕심이 크고 호기심이 많아서 형질 발현만 안 되었을 뿐이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현무 궁 생활에 익숙해지는 아니는 무술 선생도 문학 선생도 모두 칭찬을 하고 자랑스러워 했다. 성장기에 들어선 아이는 빠르게 자라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분위기가 바뀌곤 했다.
“네? 후계자요?”
“…….”
“그런건 가주께 직접 여쭈어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제가 여기서 함부로 말할 사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스스로도 딱히 권력에 욕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쉽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있는 딕은 가끔 날아드는 당황스러운 질문도 유들유들하게 넘길 줄 알았다. 몸만 훌쩍 큰 딕은 그 후 몇 번이나 더 브루스를 귀찮게 하면서 동생을 조르다 결국 제 손으로 동생이 될 아이를 구해 나타났다.
원칙을 따지자면 성년식 전, 특히 형질 발현 전 아이들은 궁에서 나가지 못했다. 후계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궁 밖을 출입하던 아이들이 변을 당한 일이 있은 후부터 쭉 지켜 내려오던 관습이었다. 도시 곳곳에 굴을 파고 먹잇감을 찾는 사냥꾼들은 민가에서 태어난 알파나 오메가들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궁을 습격하기도 했다. 몇 번이나 공격을 받은 궁들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했다. 유난히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현무 궁은 더했다. 브루스의 부모가 비명에 간 이후로 문을 걸어 잠가버린 궁은 좀처럼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았다.
거리 아래쪽을 파고들어가 개미 굴 마냥 복잡하게 근거지를 만든 사냥꾼의 조직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모두들 쉬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세력이 커진 것은 부잣집의 알 수 없는 취미와 상당히 연이 깊었다. 그들은 알파나 오메가나 하는 아이들을 잘 구분하진 못했지만, 성장기에 며칠씩 앓아눕고 그 이후에 규칙적으로 정신을 놓고 끙끙 앓아눕는 아이들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손을 본다면 튼튼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속설이 있기도 했다. 돈이 꽤나 있다는 집안에서는 몰래 알파나 오메가를 사들여 키우곤 했다. 물론 잘 알아보기 힘든 알파보다는 주기적으로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는 오메가가 훨씬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물론 그런 아이들은 민가에서 성년식을 치루면 자연스럽게 베타가 되곤 했다. 하지만 성년식을 치르기 전에 자손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성년이 지난 오메가가 어떻게 되는지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몇이나 불행한 인생을 만들어 내는 시장은 단지 사람들의 흥미로 커진 것이었다. 한번 커진 시장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겨울에 화려한 꽃이 필 확률보다 낮은 확률로 민가에서 귀한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너무 희귀한 확률이라 찾긴 힘들었지만 한명만 잡아오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딕이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 불허하는 브루스를 일주일이나 귀찮게 하고 또 삼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히 몸을 지킬 무술을 갈고 닦았으며, 가는 길도 완벽하게 숙지하고 끝나자마자 당장 돌아올 것이며 원한다면 브루스가 붙여준 사람을 데리고 가겠다고 종알종알 끊임없이 말한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영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주와는 달리 잔뜩 신이 난 딕은 연신 팔짝거리며 온 방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얌전히 다녀올게요. 네? 네?”
“난 널 밖으로 보내고 싶지 않구나.”
“브루스. 네? 한 번 만요 네?”
“…….”
“약속 했잖아요!”
“그래. 알았다. 대신 약속 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
“알았어요.”
뒤통수에 계속 달라붙는 걱정 어린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는지 잔뜩 신난 딕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궁에서 입는 화려한 의상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이유를 들며 설명하는 시종장의 말대로 고분고분 옷을 벗었다. 시녀들이 외출복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깨부근에 가볍게 덧대져 있던 노란 망토가 스르륵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록달록 고운 색으로 만들어진 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에 푸른 깃이 달린 옷은 언뜻 보면 평범해보였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굉장히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은은한 문양을 새긴 겉옷을 잘 여미고 허리띠를 둘러주었다. 혹시 모를 이에 대비에 눈 주위를 가릴 수 있는 가면까지 씌워주고 나서야 꼭 감고 있던 눈을 뜬 딕이 시종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알피!”
“무슨 말씀을요.”
“알피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깜박깜박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며 생글 웃어 보인 딕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다운 표현력에 늙은 시종장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까만 가면 속에서 잔뜩 빛나고 있는 파란 눈이 호기심에 반질반질 빛이 났다. 빙글 한 바퀴 돌며 외출복을 자랑이라도 하다 이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른이라고 하기엔 아직 채 성장기를 다 지내지 않은 아이는 연식 웃으면서 마차 주위를 맴돌더니 어느새 또 바람같이 사라졌다. 길게 뻗기 시작하는 팔과 다리로 성큼성큼 원하는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이내 담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가면을 톡톡 치며 웃고 있던 딕의 눈이 반짝였다 생각했다. 딕은 나이에 비해 철이 들었긴 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그럼…어쩌지?”
딕이 찾아가려는 학자는 현무 궁이 관할하는 지역의 외곽에 조용히 살고 있었다. 비단처럼 윤기 나는 갈기를 가진 훌륭한 말이 마차 앞으로 걸어왔다. 두 필의 말의 입에 고삐와 재갈이 물려지는 것을 보고 있던 딕이 키득키득 웃으며 조용히 담장 아래 있는 커다란 돌을 밟고 올라갔다. 끙끙대면서 담장위로 올라간 딕이 까르르 웃음을 남기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제법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나 싶더니 가볍게 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섰다. 이럴 때 쓰라고 받은 힘은 아니었지만 어린 아이가 그런 것을 알 리 없었다. 시종장이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저 멀리 들리자 재빨리 담장을 끼고 돌아 저잣거리에 섞여들었다. 현무궁을 완전히 벗어나자 딕은 크게 한숨을 쉬며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예전에 공연차 몇 번이나 오갔던 거리였다. 시간은 제법 지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낯설진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딕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보는 게 좋을까?”
한참 속으로 오른쪽과 왼쪽을 셈하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오른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채 한걸음도 걷기 전에 묵직한 짐 덩이가 와서 들이 받는 것처럼 품에 무엇인가 묵직하게 안겨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을 버틸만한 몸집이 아니었기에 곧장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충격으로 벗겨진 가면은 저 멀리 굴러가 흙먼지를 쓴 채 널부러졌고, 제대로 넘어져서 부딪힌 등과 엉덩이가 얼얼하게 아파왔다. 끙끙대며 벗어나려했지만 배위에 묵직하게 얹힌 것을 좀처럼 밀어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버둥대던 딕이 잔뜩 찡그린 눈을 떴다.
“아야야.”
“…….”
“도대체…뭐야.”
“…….”
품 안에서 버둥대는 걸 떼어내며 눈을 굴려 상황을 살폈다. 눈앞에 어른 거리는 것을 손으로 쭉 밀어냈다. 손바닥에 잔뜩 상한 검은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었다. 놀란 눈을 크게 뜬 딕이 눈만 연신 깜박거리다가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보았다. 그리곤 볼을 따라 내려가 어깨를 잡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생각보다 어린 아이였다.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 사이에서 바다 같은 푸른색이 형형한 눈초라가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런 눈을 알아챈 딕이 아이를 좀 더 보듬어 안았다. 조금 더 컸더라면 왜 버둥거리기만 하는지도 알았을 테지만 아직 그런 눈치는 없었다. 일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기습은 아닌 거 같고, 아직 어리니 말이라도 건네 보자 싶어 천천히 입을 떼려는데 급하게 달려오는 한 무리 사람들을 발견하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정작 불시에 기습 아닌 기습을 당해 넘어진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지 품안 사내아이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려는 손을 보고 묘하게 짜증이 났다. 그리곤 그 거칠고 투박한 손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쳐내며 저지시켰다.
“무엄하다! 네놈들은 누구냐!”
“…….”
“누군지 어서 이름을 대라! 현무 궁의 보호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있다.”
“…….”
좀처럼 대답이 없었다. 낮게 혀를 차고 씹어 먹는 것처럼 욕설을 내뱉는 소리다 들렸다. 당장이라도 도망가려는 아이를 꾹 잡아 눌렀다. 좁은 가슴에 뿌듯하게 들어차는 아이가 몇 번이나 거친 숨을 뱉더니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은 등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준 딕이 눈앞에 모여 있는 사내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있었고, 은은하게 빛나는 공단과 비단으로 만든 옷은 흙먼지가 묻어 볼품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귀한 집 자제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소리를 칠 정도면 어지간한 세도가 집안이 분명했다. 손마다 무기를 들고 있던 무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대장인 듯한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도련님 이런 곳에서 함부로 소리치시면 큰일 납니다?”
“넌 누구냐!”
“…글쎄요. 이름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존재입지요.”
“뭐라고?”
“귀하신 도련님에게 손을 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저기 저 놈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요.”
어른보다 한없이 작은 체구의 아이가 소리치는 것이 그저 고양이 우는 것 같았는지 뱀 같은 눈을 한 사내는 바락바락 대드는 목소린 이미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오로지 관심사는 멋대로 도망친 꼬마뿐이었다. 귀한 외모라 비싸게 팔릴 것이 분명하니 단단히 감시하라 일러뒀는데, 멍청한 부하 놈들이 술을 먹다 결국 이 사단을 낸 것이었다. 흔하지 않은 돈줄을 놓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못 했을 거라 생각해 뒤지고 다녔는데 마침 눈앞에 넘어진 채 발견된 참이었다. 그리곤 웬 꼬마 녀석이 앞을 막아섰다.
“…이 아이에게 볼일이 있다. 무슨 잘못을 했나?”
“알거 없지 않으십니까. 도련님께선 어서 들어가 보셔야죠.”
우악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채는 손을 또 한 번 저지하며 아이를 좀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겨 숨겨주었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을 보아하니 얌전히 넘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한쪽 손을 들자 딕 위로 돌아들어간 부하 둘이 얇은 팔을 잡아 채 아이와 떨어뜨렸다.
“어디다 손을 대느냐!!!”
몸 안에서 왈칵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사내들이 붕 떠서 과일을 담아둔 것에 처박혔다. 잔뜩 화가나 자신이 던져버린 남자들을 휙 돌아본 눈에선 푸른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은 식을 줄 몰랐다. 평범한 꼬맹이가 아님을 직감한 대장 격인 남자가 칼을 빼들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크게 칼을 위로 치켜 올리자 검 날에 태양에 반사되어 쨍하게 딕의 뒤통수로 쏟아져 내렸다.
“으악!!”
그 순간 사내의 그림자에서 타고 올라온 검은 기운이 마치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팔을 타고 올라가 칼을 둘둘 감쌌다. 쩡 하고 금속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검 날이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손을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는 사내의 발은 이미 그림자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감히 기습을 하려해?”
“…….”
“유괴 및 불법 노예 매매는 중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지금 널 심판해도 할 말이 없다.”
“힉!”
“허나 내가 아버지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는바 이번일은 이정도로 넘어가겠다.”
“…….”
“다시 한 번 내 눈에 띈다면 그땐 이정도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알아들었나!”
“예…예.”
“좋아.”
허락이라도 한 듯 그림자에서 발이 쑥 뽑혀 올라왔다. 허겁지겁 부하들을 챙겨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살살 어깨를 흔들어 아이를 불렀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다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손목엔 잔뜩 생채기가 나있었고 거친 밧줄이 둘둘 감여 있었다. 밧줄을 풀어주고 손을 잡아왔다. 화들짝 놀라는 얼굴을 보며 조용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깐 겁을 주느라 그랬어. 많이 놀랐지?”
“…….”
“이대로 널 두고 가면 분명 해코지를 할거야. 나랑 같이 갈래?”
“…….”
“싫어?”
“…….”
“싫어하면 안 되는데.”
좋다 싫다 말을 안 하는 것을 애써 좋은 쪽으로 해석한 딕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손을 꼭 잡은 채 현무 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걸음 걷다 아차 싶었는지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와 가면을 찾았다. 이미 잔뜩 망가진 걸 다시 쓸수는 없어 그대로 반대쪽 손에 쥐었다.
“있지. 내 동생 하지 않을래?”
“…….”
“말 좀 해봐. 말 못해?”
“…….”
작게 고개를 흔드는 걸 보면 귀는 멀쩡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 하나를 주워 현무 궁으로 돌아온 딕은 시종들에게 아이를 부탁하기도 전에 벼락같은 부름을 받았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깨져버린 모래시계 속 모래였다. 생명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하얗게 질린 딕이 시종장의 손에 질질 끌려 집무실로 걸어갔다. 근래 들어 이렇게 화가 난 브루스를 본 적이 없었다. 잔뜩 겁에 질려서 눈만 빠끔히 뜨고 있던 딕이 입을 달싹거리려다 이내 포기했다.
“…넌 내 명령을 어겼어.”
“하지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죽었을 텐데.”
“딕. 함부로 현무의 힘을 개방하면 안 된다 하지 않았더냐. 몇 번이나 내가 얘기 했지? 그러다 정말 큰일 날 수도 있단 말이다.”
“그래도 브루스는…브루스가 곤경에 처한 사람은 도와줘야 한다고 해서…….”
“…….”
“그리고 분명히 갑자기 동생이 될 아이가 찾아오면 데리고 와도 된다 했잖아요.”
“…….”
종알 종알 말하던 아이가 힉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고 또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런 모습을 보던 브루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불법 노예 매매나 유괴 같이 인간을 도구로 보는 일이 중죄라는 것은 브루스가 가르친 것이 맞았다. 멋대로 명령을 어기고 혼자 궁을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몸 성히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왔으니 이정도로만 혼을 내기로 했다. 눈치를 보던 딕이 얼른 브루스이 팔에 붙어왔다. 브루스는 굳이 그걸 쳐내지 않았다. 도대체 이 녀석은 누굴 닮았을까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동생으로 삼아도 괜찮아요?”
“…….”
“네? 브루스. 저 이제 말 잘 들을게요. 네?”
“그러도록 해라.”
“정말요? 정말이죠? 여긴 나한테 너무 넓었는데 잘됐다. 고마워요!”
과장되게 발돋움을 해 볼에 쪽 입을 맞춘 아이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브루스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가 영 마음에 걸려 며칠 뒤 방을 찾아갔었다. 이름은 제이슨 토드. 신분과 출생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딕보다 어린 나이에 현무 궁에 받아들여진 제이슨은 곧 성장기를 맞으며 알파로 각성을 했다. 성장 열에 끙끙 앓는 제이슨 옆을 지키던 딕이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동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브루스는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채워줄 만큼 딕이 옆에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궁 안을 갑갑해 하고 못 견뎌 했다. 몇 번이나 무단으로 궁 밖으로 나가더니 어느새 반쯤 가출한 상태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고 제이슨이 돌아왔을 때 잔뜩 화가 난 브루스를 막아준 것은 딕이었고 언제나처럼 둘 사이에 파고들어 동생을 숨겨주었다. 몇 번이나 어디 가는지 방향이라도 알고자 했지만 제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굶지 말라고 쥐어준 패물이며 반지도 싫다하니 딕은 나날이 한숨이 늘어갔다. 반쯤 방안에 넣어두고 온 금붙이를 내던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또 나갔어요?”
“예. 방 안이 조용해서 들여다보니…….”
“언제 돌아오려나.”
“그래도 챙겨주신 패물을 들고 나가셨으니, 떨어지면 돌아오시지 않을 까 합니다.”
“…제이슨.”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도련님만큼 강하신 분이니까요.”
“그래도…….”
잠깐이나마 넓고 쓸쓸한 곳에 부대끼고 살 동생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휙 사라져버렸다. 딕은 소식도 알려주지 않는 제이슨을 기다리며 내내 한숨을 입에 단 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시들시들 앓아가는 딕을 보던 시종장이 좋아하는 간식을 올렸지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눈은 언제나 저 멀리 담장을 넘겨다보았다.
여전히 작고 귀엽고 사근사근한 동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딕에게 어느 날 또 한 번 품안으로 동생이 뚝 떨어졌다. 우연도 여러 번 얽히고설키다보면 필연이 된다고 했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궁 안에 들어온 아이는 갓 젖이나 뗐을까 싶은 갓난아이였다.
초가을이라고 하지만 작고 여린 아이가 언제 발견될지도 모르는 담장 밑에서 얇은 천 하나에 싸인 채 버티기엔 너무 추운 날이었다. 끊어질듯 하면서도 가늘게 이어지는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에게 다과를 가져다 주러온 어린 여종이었다. 항상 해온 일인 듯 수문장들에게 쟁반을 넘기고 돌아가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차가운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넓은 마당에 데굴데굴 굴러가다 다시 쓸려서 하늘로 올라갔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붉은 화로에는 숯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주황색 불꽃 조각이 화르르 위로 솟아올랐다. 잠깐 추위에 부르르 떨던 여린 몸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고양인가?”
고양이가 배를 굶고 있나 싶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풀숲을 해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벌써 겁을 먹고 도망을 갔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한참을 풀숲만 쳐다보다 이내 몸을 돌려 돌아가던 소녀의 뒤통수를 쭉 잡아당기는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아닌데. 아직 있는 거 같아.”
“아가. 아직 안 들어가고 뭐하냐. 그런 얇은 옷으로는 가을바람이 춥다. 감기 걸리기 전에 어여 들어가.”
“저기, 수문장님 혹시 고양이 소리 같은 거 못 들으셨어요?”
“응? 아까부터 담 밖에서 뭐가 울긴 하더구나.”
“어, 아니에요 아기 울음소리인거 같은데.”
“아기 울음소리?”
“네. 잘 들어보세요.”
“흠…난 잘 모르겠구나.”
“고양이 소리가 아니에요. 이건 아이 울음소리인데. 이런 추운 날 어디서 들리는 거지?”
“뭐?”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문 밖에서 큰 소리가 나긴 했는데…….”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잠깐 나가봐도 괜찮아요?”
“그래라. 너무 멀리 나가진 말고.”
조그만 체구 하나 나갈 만큼 궁의 큰 문을 열고 밖으로 살짝 나간 여종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비명을 빽 지르더니 무엇인가 허겁지겁 품에 안고 뛰어 들어왔다. 계집종의 품안에 안긴 건 얼마나 오래 그 곳에 있었는지 파랗게 얼어버린 갓난아이였고, 벌벌 떨면서 무엇인가 말을 하는 아이를 달랜 수문장이 곧 시종장을 모셔왔다.
문 밖의 상황은 처참했다. 잔혹하게 살해된 여인의 시신이 문 바로 앞에 쓰러져 있었고, 거리와 문 사이에 있는 안전지대에 낡은 천으로 둘둘 싸인 아이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아이를 지키려 궁의 보호 결계 속으로 밀어 넣은 것으로 추정했다.
날이 밝고 시신을 빠르게 수습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여인의 집이었고, 엉망으로 부서진 집 안에선 남편이 발견되었다. 반쯤 내려앉은 집과 달리 패물이나 다른 것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아 분명 노예 시장에 사람을 공급하는 무리들이 벌인 일이 분명했다. 아주 낮은 확률로 민가에서 태어나는 알파나 오메가들은 끊임없는 위협을 받기 마련이었다. 사냥꾼들이라면 한 둘은 데리고 있는 노예들이 정보를 알려오고 그걸 토대로 유괴를 자행하곤 했다. 물론 각 궁마다 민가 태생 아이들을 거두어들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진 않았으나 합법적인 방법보다 불법적인 것이 훨씬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또 그 것들이 움직였다 이건가.”
“예. 아무래도 궁에서 수소문을 하는 것은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너무 상심하지 마시옵소서.”
“아닐세.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지.”
그렇게 본다면 이 아이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잡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얼어 죽기 전에 발견된 아이는 잔뜩 언 몸으로 울어대다 몇 사람의 손을 타고 나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아이의 부모는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게.”
“예.”
“하아.”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처리하도록 명한 브루스가 궁 안에 들어왔을 때 시종장이 그의 앞에 서서 잠시 방으로 가줄 것을 청했다. 다행히 아이는 어느 하나 찢기고 쓸린 곳 없이 무사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어느 정도 열이 내리자 신녀가 아이를 보러왔다. 그리곤 곧 민가에서 태어난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려왔고, 그 사실은 곧 브루스의 귀에 들어갔다. 브루스가 방문을 열었을 때 아이는 한참 잠을 자고 있었다. 질 좋은 솜을 잔뜩 넣어 포근하게 만든 요람에서 색색거리며 잠든 아이 곁엔 눈을 빛내고 붙어 앉은 큰 아이가 있었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신기한지 연신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볼을 만지작거리던 딕이 브루스를 보자 생글 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브루스. 이 아이는 오메가래요.”
“그래 그렇게 들었다.”
“아기가 갈 곳도 없는데…그럼 또 내 동생이 되는 건가요?”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저 아인 자기가 지금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를걸요.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려면 한참은 더 커야 할 거에요.”
“…….”
“나…또 동생이 생길 거 같은데. 맞나요?”
“…….”
“맞죠? 신난다. 이번엔 좀 얌전하고 착하고 귀여웠으면 좋겠어요. 제이슨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어쩔 수 없지.”
“브루스는 좀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딕!”
“농담이에요.”
까만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보던 딕은 결국 잘 자고 있던 아이를 깨우고 말았다. 서럽게 우는 아이를 받아 안은 시종장이 익숙하게 달래주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자 옆에 있던 유모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히끅 히끅 눈물방울을 매달고 울던 아이가 간신히 잠잠해지자 딕은 결국 브루스에게 뒷덜미를 잡혀 방 안에서 끌려 나갔다.
아이의 이름은 배냇저고리의 옷깃에 쓰인 대로 티모시 드레이크라고 부르기로 했다. 부모는 장례를 치르고 작은 위패에 이름이 새겨진 채 궁 안에 마련된 제단 한 쪽에 모셔졌다. 처음엔 티모시 티모시 하고 아이를 부르던 딕은 영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팀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방 안을 기웃거리며 얼굴을 보러오곤 했다.
제이슨에게도 동생이 생긴 걸 알려주고 싶어서 몇 번이나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뒤집기를 시작하고 제법 사람들이 익숙해져 웃기 시작하는 팀은 다시 한 번 궁 안에 봄을 가져다주었다. 어설프게 팀을 안고 있는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시종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신이 났다. 팀은 어릴 때부터 오메가의 형질이 나타났고, 딕과는 다르게 절대 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동생과 같이 놀러 다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번만큼은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자그마한 손이 딕의 얼굴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만져 올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팀. 형 이라고 해봐 형.”
“…….”
“도련님. 아직 말을 하기엔 너무 어리십니다.”
“…형이라고 해봐.”
“…….”
“언제쯤 말을 할까요?”
“글쎄요.”
팀은 큰 소란 없이 궁에서 자라났고, 밖으로 다니는 대신 책과 서류에 묻혀서 살기 시작했다. 브루스의 명령에 따라 둘 다 무술을 배웠고, 가끔은 서로 대련을 할 때도 있었다. 무술을 배우기 위해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팀이 허리를 안고 와락 안기며 형이라고 부르면 딕은 뭐든지 해주고 싶어 했다. 나이가 먹으면서 눈에 띄는 애교는 점차 없어져 섭섭했지만 팀은 여전히 좋은 동생이었고, 착한 아들이었으며 똑똑한 후계자 후보였다. 가끔 제이슨이 궁을 들어오긴 했지만 그 때마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팀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어렴풋하게 팀의 모습을 보면서 동생의 존재를 알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접촉하려 들진 않았다.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를 본능적으로 깨우친 제이슨은 오메가인 자신의 동생에게 접근하는 것을 꺼려했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인연은 기묘하게 얽힌 형제 관계는 후계자 자리가 불거지면서 좀 더 소란스러웠지만, 형제들 사이엔 큰 소리 한 번 나지 않고 무사히 흘러가곤 했다. 형제들이 자랄수록 신하들의 걱정 소리는 커졌지만 적어도 형제들 사이에선 그 누구 하나도 후계자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며칠 아니 몇 달씩 끌면서 현무 궁을 괴롭혀온 후계자 문제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모든 가신들이 머리를 싸매고 어떤 아들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한 것은 한조각 휴지도 못하게 되어 사라져버렸다.
“예? 누굴 찾아오셨…….”
“…….”
“궁에는 함부로 들어가…커헉!!!”
“내 집에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문지기의 배를 걷어찬 작은 아이가 다짜고짜 현무궁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무리 반 강제로 문을 열었다 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건만 아무런 제한 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처음 보는 광경에 잔뜩 놀란 시종들이 멈춰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사들도 제지할 수 없는 작은 아이는 살기를 흉흉하게 풍기며 브루스 웨인을 찾았다. 급하게 달려 나온 딕의 눈엔 브루스의 어린 시절을 그려놓은 족자에서 보았던 얼굴을 빼다 박은 아이가 보였다.
“…넌 누구야. 누군데 내 집에 함부로 들어와 있는 거지?”
“꼬맹이가 입이 상당히 험하구나?”
“감히 누구보고!!!”
결국 이 싸움은 브루스가 나서서야 해결되었다. 나중에 찬찬히 물어보고 어르고 달래며 반강제로 알아낸 사실이지만 이 꼬마, 그러니까 데미안 알굴은 브루스 웨인과 여성 알파인 탈리아 알굴 사이에서 나온 유일한 친자였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진실은 영 믿을 수 없었지만 아니라고 반박할 증거가 부족했다. 아마 데미안이 열 살이 된 지금까지 현무 궁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알굴 가문의 철저함 때문이 분명했다. 브루스는 탈리아 알굴과의 마지막 만남이 몇 년 전 이었는지 조차 잘 기억하지 못했다.
여느 암살자처럼 시커먼 옷을 둘둘 말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 브루스는 또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성을 선택할 기회도 주었다. 지금까지 궁에 들어온 여느 아들에게 그랬듯 데미안은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내 성을 따르겠느냐.”
“물론이죠.”
“그럼 네 어미와는 인연이 끊기게 될 수도 있다.”
“이미 반쯤 끊고 나왔으니 아버님은 그 일로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성을 따라 현무 궁을 이어받는 것이지 어머니가 아니니까요.”
“…….”
“설마 눈앞에 친자를 두고 양자 따위한테 궁을 물려주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
맹랑한 말을 하는 데미안은 전혀 그 나이 어린이처럼 귀엽지 않았다. 부모나 손위 형제들에게 애교는 고사하고 호전적이고 거칠었으며, 몸놀림은 일급 암살자마냥 조심스러웠다. 후계자가 있는지부터 따져 묻던 아이는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곤 잠시 대화가 끊기자 브루스 옆에 서있던 딕을 힐끔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아주 희미하게 오메가의 기운이 느껴지긴 했지만 베타였다. 자신이 알굴 가문에서 맡았던 우성 오메가들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약한 향에 데미안은 살짝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저런 녀석을 곁에 두다니 격이 떨어질 것 같다고 말하려 했지만, 브루스의 형형한 눈을 보며 그 말은 꿀꺽 삼켜버렸다. 브루스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아이를 받아들였다.
“그래. 넌 이제부터 데미안 웨인이다.”
“알겠습니다.”
“이 날 이후 알굴 가문과 관련된 모든 인연은 없던 것과 마찬가지며, 이를 어길 시 엄하게 벌을 내릴 것이다. 너도 우리 가문과 알굴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터, 후계자 자리를 요구하는 만큼 그에 맞는 격식을 보이도록 해라.”
“물론이죠. 아버님.”
“그리고…….”
“예?”
“후계자로 널 올리되 나이가 많이 어리니 네가 맡아서 해야 할 조세와 무역 관련 업무는 성인이 될 때까지 현재 관리 책임자인 팀 드레이크에게 양도한다.”
“…….”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 보거라. 네 방은 아마 지금쯤 준비가 되었을 거다.”
의자에서 일어난 데미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탈리아는 분명 궁의 법도를 가르쳤고, 데미는 배운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는 막내 아들을 불러 세우고 딕에게 눈짓을 했다. 살짝 웃으며 데미 앞에선 딕이 가볍게 브루스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아버지를 향한 간결한 인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이마를 찌푸린 아이가 딕을 쏘아보았다.
“안녕. 오늘부터 네 형이 될 거야.”
“웃기는 소리.”
“데미안. 딕에게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해라. 딕 데미안을 준비된 방으로 데려다 주거라.”
“…….”
“알았어요. 브루스.”
“아버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데미안!”
“…….”
당장이라도 싸움을 걸 기세인 진정시키고 밖으로 내보낸 브루스가 길게 한숨을 쉬며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대고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교육을 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단단하게 완성된 뒤틀린 가치관은 분명 바로잡아야하지만 그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브루스가 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 딕은 연신 미소를 띠고 막내 동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언제 봤다고 이리 친한 척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잡힌 소매를 휙 뿌리치고 걸어가는 데미안 앞을 막아선 딕이 달빛을 거꾸로 받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체격이 앞을 가로막자 자연스럽게 경계 하는 데미안은 전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난 딕 그레이슨이야. 데미안 웨인.”
“…….”
“잘 부탁해?”
“…베타 따위한테 환영 인사 받고 싶지 않고 형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그러면 섭섭한데.”
“흥.”
“형이라 불러주면 안되겠어?”
“시끄러워 머리 울리니까 입 다물어. 딕 그레이슨.”
“…….”
어깨를 으쓱 올려보곤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데미안의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손가락이 어깨에 닿기도 전에 되게 손등을 얻어맞았다. 아야야. 눈물을 닦는 것 같은 눈 밑을 슥 닦아내던 딕이 저만큼 척척 걸어가는 데미안의 뒤를 급하게 따라갔다.
“데미안. 기다려. 너 방이 어디인지 모르잖아.”
“…시끄러워.”
“데미…….”
“형?”
“아, 팀.”
오른쪽으로 크게 꺾인 복도를 돌자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혹시 몰라서 절대 방 밖으로 나오지 말고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를 하자고 당부를 했는데, 바깥이 계속 시끄러워서 나와 본 모양이었다. 막 침상에 들려던 참인지 겉에 긴 옷을 하나만 걸친 채 걸어오던 팀이 허리부근에 쿵 부딪히려는 데미안을 피해 한걸음 물러났다. 잠깐 멈칫하던 데미안이 무엇인가 느꼈는지 사납게 팀을 쏘아보았다. 자신을 향한 공격적인 분위기에 겉옷을 꾹 움켜쥔 팀이 놀란 눈으로 딕과 데미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던 이유가 이것인가 했지만, 도무지 저 아이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저기…형? 누구?”
“아, 이게 말하자면 긴데…….”
“…….”
“일단 오늘부터 네 동생이 될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일어나서 모두들 모였을 때 하기로 하자.”
“…동생?”
“오메가 따위를 형으로 둘 생각 없어!!”
“뭐?”
“감히 오메가가 알파 위에 있으려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집안인거야!”
“아…저기. 팀 방으로 돌아가 어서!”
급하게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동생에게 방으로 돌아가라 말했지만 단단히 화가 난 팀은 자리에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조그만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손을 뻗어 손목을 틀어쥐었다. 사납게 손목을 뿌리치곤 그대로 팀에게 덤벼들더니 그대로 몸을 넘어뜨렸다. 복도에 장식된 도자기들이 둘의 몸에 밀려 와장창 깨져나갔다. 일순 균형이 무너져 뒤로 넘어가 복도에 제대로 부딪힌 팀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일렁이는 눈이 사납게 기운을 내뿜으며 데미안의 멱살을 잡았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오메가…따위가!!!”
“그래 어디 한번 오메가한테 늘씬하게 맞아보지 그러냐!”
비록 데미안이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알파의 기운이 강했다. 물론 보통의 상황에선 오메가가 알파를 이기는 것은 힘들었지만,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브루스의 명령 아래 몇 해 동안이나 무술을 배우고 현무 궁에서 자란 팀을 단숨에 제압하기는 힘들었다. 형형한 기운을 잔뜩 뿜어내면서 서로 멱살을 잡고 씩씩대는 둘을 간신히 떼어놓은 딕이 제발 그만 좀 하라며 둘의 어깨를 꾹 짓눌렀다.
“이렇게 싸우면 당장 가서 브루스에게 말씀 드리겠다.”
“아버님…이름 함부로…아악!!”
“형!! 저 놈이 먼저 그랬단…아야!”
“제발 말 좀 들어라.”
어깨에 천근의 돌이 올라앉은 것처럼 무겁게 누르는 손을 피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빠져나가지 못한 채 버둥대던 둘이 이내 포기한 채 바닥에 축 늘어졌다. 몇 번이나 꾹꾹 둘을 눌러 내리던 손이 떨어져나가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다시 덤벼들 것처럼 으르렁 거리는 데미안을 등 뒤로 보내고 팀에게 손을 내밀어 일어서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시 한 번만 싸우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알겠지. 팀?”
“…….”
“팀.”
“알았어요.”
동생의 등을 툭툭 두들겨서 방으로 돌려보낸 딕이 식은땀을 훔치며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등을 짓누르던 기운에 잔뜩 눌린 아이가 맹수 앞에선 먹잇감처럼 축 늘어져서 반항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배운 기초 중에 기초였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대드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고분고분해진 데미안의 손을 조물 거리던 딕이 기분이 풀린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잡아끌었다. 반쯤 끌려가 자신의 방 앞에 선 데미안이 등이 떠밀려 안으로 들어갔다.
“잘 자. 데미안.”
“…….”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거니까 식사는 함께 하도록 하자. 알았지?”
“…….”
“그리고 팀을 찾아갈 생각이면 그만두도록 해. 궁 안에서 큰소리가 나면 나도 정말 화를 낼 거니까.”
“…….”
“알았지?”
“알았으니까…좀 꺼져! 딕 그레이슨!!!”
딕은 그런 동생의 눈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큭큭 웃었다. 그리곤 살짝 열린 곳을 노리고 베개가 날아드는 것을 보며 방문을 밀어 닫았다. 어쩜 이렇게 동생들마다 다 다를까. 하나도 닮지 않은 동생들을 끌어안은 딕은 잠시 브루스의 자식 관에 대해 생각을 했다. 방 안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이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는 동생의 기대를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크게 발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알굴에서 배운 것과 전혀 반대로 돌아가는 현무 궁이 이상할 뿐이었다. 탈리아는 데미안에게 알파는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의 위에 있어야하고 오메가는 알파에게 순종하며 유순해야한다고 가르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오메가들은 그런 가르침에 복종하고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메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알파의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알굴 가문에서는 감히 오메가가 무술을 배우거나 글을 배우는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오메가랑 베타가…형이라니.”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지만 일단 현무 궁에 들어온 이상 조금은 맞춰주기로 했다. 방문 앞에 떨어져 있던 베개를 주워와 이불을 휙 돌려 덮었다. 포근한 이불과 따뜻하고 조용한 방과는 달리 당장이라도 팀 드레이크라는 오메가의 목을 꺾어놓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쳤다. 몇 번이나 씩씩대던 데미안은 이내 잠이 들었는지 조용조용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아무런 위협이 없는 곳에서 잠이 든 아이는 아침 해가 뜨고 딕이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보다 몇 살이나 많은 형들에게 따박 따박 딕 그레이슨, 팀 드레이크라 부르는 이 작은 아이는 어쨌든 현무 가문의 유일한 적자였다.
'디씨 >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 011] 브루딕 원고 샘플 (0) | 2014.02.23 |
---|---|
[글 010] 센티넬버스 | 슨로이 (0) | 2014.01.23 |
[글 007-1] 딕뎀 for 꽃님 (0) | 2013.12.01 |
[글 007] 딕뎀(R18) for 꽃님 (2) | 2013.12.01 |
[글 006] 저스티스 로드AU | 딕 그레이슨 (0) | 2013.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