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잠이 깬 것도 모자라 툴툴거리기까지 한다. 물론 저렇게 펄쩍 뛰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언제는 늘 독자적인 히어로인 것처럼 굴다가도 어른이 있으면 여지없는 어린애가 된다. 그게 그저 토니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까 차에서 피터를 깨우느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금방 눈을 뜬다. 하여튼 저 스파이디 센서는 이럴 때마다 눈치가 없다.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 멀어진다. 어린애가 맬 것 같은 가방을 끌어안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녀석은 어디로 내려야 할지도 감을 잡지 못했다. 예민하기만 할 뿐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애였다.
‘저…스타크 씨.’
‘왜?’
‘도착한 거 같은데…….’
‘어, 그렇네.’
‘내려야…….’
일부러 피터를 껴안는 것처럼 몸을 굽힌다. 그러면 또 펄쩍 뛴다. 별거 아니라는 말과 함께 차 문을 열어준다. 몇 번이나 반복된 행동인데 피터는 늘 처음인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훌쩍 날아온 업스테이트에는 늘 크고 웅장했다.
“저 놀러 온 거 아니니까. 언제든 필요한 걸 시키시면 되는데.”
“벌써 그런 생각을…….”
“…….”
“걱정하지 마. 이제 그만해달라고 할 때까지 훈련을 받게 될 테니까.”
“어우. 스타크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무섭네요.”
“위에 올라가서 짐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어. 여긴 사람이 좀 많아서 말이야.”
“…….”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조용하긴 했다. 이곳은 거점과도 같은 곳이기에 많은 히어로들은 각자의 일정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그런 와중에 피터를 훈련하겠다며 부득불 이곳으로 데려온 토니 스타크는 이번 일정을 위해 다른 히어로들도 불러들이고 있었다.
“새로운 히어로를 소개하는데 이 정도 자리는 되어야지.”
“원래 다들 이렇게 해요?”
“그럼 안 할까?”
“…….”
“왜? 또 못 믿어?”
“그건 아니고…히어로 되는 일이 뭐 그렇게 크고 대단한 일이라고. 조금 민망해요.”
“언젠간 익숙해지겠지.”
“전 절대 안 될 거 같아요.”
피터는 자신을 잘 안다고 말하곤 했다. 토니는 그런 말을 슬쩍 흘려들으면서 피터에게 숙소를 알려줬다. 캐런 불러줘? 이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수트 안에 아직 내장되어있는 것은 맞지만, 피터는 수트 누나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움직이길 원하고 있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래. 혹시 길 잃어버리면 전화해.”
“아이참.”
“어서 올라가 봐.”
“네. 이따가 내려올게요.”
“…….”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선다. 하긴 막 어벤저스에 들어온 새내기들이 여기서 훈련을 받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쪽을 부르는 것이 맞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 수 있었다.
마법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생텀에 돌아간 뒤로 딱히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어벤져스에게 소식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큰일이 지난 이후 복구할 일이 더 많았다. 그리고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놈이 와봤자 스파이더맨에게 무슨 능력을 가르친단 말인가. 정말 쓸모라곤 없는 놈들이 많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헐크도, 캡틴 아메리카도.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굴 붙여놔도 헛소리를 할 것 같은 불안함에 휩싸인다. 사실 토니 스타크는 자기 스스로 컨트롤 프릭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걸 맘대로 멈출 수도 없었다. 그게 일찌감치 조절되었다면 애초에 작은 거미가 입을 슈트에 그 많은 기술을 접목해두지도 않았다.
“…이런 거 생각을. 해봤자 되는 것도 안 되는 법이지.”
사실 토니 스타크는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안 되는 일도 할 수 있게 만들 만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머리가 좋은 만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구분을 한다. 물론 그 많은 사건 중에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자기 생각을 관철할 수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와중에 피터를 만나고 나선 그런 결심이 약간 흔들리는 경우가 있었다. 큰일은 아니었다. 그저 걷다가 아주 잠깐 주저하는 정도라고 할까. 늘 앞만 보고 달려가던 사람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채 발밑을 살펴보는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나 그 변화가 삶에 제법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래서 안 된다니까.”
감상적인 생각은 모든 일이 끝나고 해도 괜찮을 텐데, 저 녀석만 보면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좋은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하필 저 녀석이었을까. 사실 캡틴 아메리카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왔을 때부터 그랬다. 그땐 누구보다 히어로로 활동하려던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많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설마 저렇게 어린애를. 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반쯤 가면이 벗겨진 채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녀석을 봤을 때. 뭔가 잘못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단 생각이 들었다. 히어로가 아닌 어린 애를 눈앞에서 만난 기분이랄까. 그 때부터 조금씩 깊어진 관계가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타노스의 부하가 나타나고, 닥터 스트레인지가 붙잡혔다.
마법사를 구하라고 했더니 그걸 붙잡고 우주까지 날아가던 녀석을 만든 것도 자신이었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럴 땐 어른의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으니 끝도 마무리를 잘해야지. 토니는 또 딴생각으로 빠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괜히 헛기침한다. 자꾸 이러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과한 관심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
“갑자기 우린 왜 소환한 거지?”
“이곳이 너무 유명무실하잖아. 가끔 들렀다 가면 좋은 거 아닌가?”
“굉장히 변명 같군.”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아직 어색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얼굴을 안 보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변에서도 그랬고, 개인적인 판단도 비슷했다. 시간이 진기 전에 모든 일을 끝맺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느냐고 민망한 마음이 커진다. 결과적으론 좋아졌다고 하지만, 완벽하게 예전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자는 다 커서 사춘기 같은 일을 겪는다고 말한다. 세상을 사는데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쪽은 유독 큰일이 많았다.
“어린 애들 훈련을 시켜야지.”
“또 큰일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는 건가?”
“언제는 우리가 그런 거 생각하고 살았나. 어차피 늘 큰일은 생기는 거니까.”
“잊을 순 없지.”
“…거 참. 나이 티 내긴.”
“자네만 하겠나.”
묘한 가시가 느껴지지만, 늘 듣던 것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이런 쪽이 나았다. 굳이 바깥에 나가 있던 어벤져스를 불러모은 속셈이 훤하다는 말을 여섯 번쯤 받았던 것 같다.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멤버를 빼고 이리저리 모여든 사람들은 이젠 익숙한지 낯선지 가늠도 되지 않는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니 도대체 뭘 하려고, 사람을 오가라 하는 거야.”
“가끔은 이렇게 친목 도모를 해줘야 팀이 잘 굴러가지.”
“방금 그 대사.”
“…왜.”
“굉장히 사업가 같았어.”
“내가 좀 그렇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여기서 한 대 쳤을 거야.”
“그것도 꼭 기억해 두지.”
오랜만에 돌아온 나타샤는 한결같았다. 그나마 말주변이 있는 사람이 오자 분위기가 나아진다. 어린애들 가르치는 것이 뭐 어려울까 하지만, 그것이 히어로 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완다도 처음 이곳에 데려와서 훈련을 시켰었는데, 이번엔 더 어린애였다. 스티브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만, 한마디 긁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보면서 나타샤가 하는 말이 늘 한결같았다. 어린애들한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며 혀를 찬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괜히 딴 곳만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세상에.”
“벌써 왔나?”
“스타크 씨가 이렇게 라인업이 휘황찬란 할 거라고 말해주시진 않았는데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온 건지 알만하네.”
“내가 뭘?”
“사업가로서 성공하기 딱 좋은 말솜씨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아뇨. 제 말은 그러니까.”
“변호하지 않아도 괜찮아. 스타크 여름방학 프로그램이 좀 화려하긴 하지.”
“…….”
당황스럽기는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업스테이트에 오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더 큰 환영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자마자 본 것이 어벤져스라니. 물론 피터가 자기도 다 큰 히어로라고 하지만 여기 모여있는 사람에 비하면 한없이 어리기만 했다. 얼굴도 공항에서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쪽도 있다. 낯을 가린다고 하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아주 편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니는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 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힘들게 모인 만큼 확실한 성과가 있는 편이 났지.”
“정말 늘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반대로 말하면 익숙해질 때도 된 거란 소리지.”
“애 놀리는데 취미를 붙였네.”
다들 한마디씩 얹으면 말이 한없이 길어진다. 사실 훈련이라고 해봤자 기본적인 내용뿐이었다. 각자 추구하는 전술이 다른 이상 완벽한 조언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토니 스타크가 어벤져스를 불러 모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목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가장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캡틴을 뺀 나머지 중 한 명을 슬그머니 불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행동에 미심쩍은 눈을 하는 멤버도 많았다.
“온 김에 정비나 받고 가지.”
“갑자기 왜 이러실까. 낯설게.”
“나중에 또 이런 걸 부탁하려면 미리미리 접대해놔야 하거든.”
“…허어. 그래. 그렇다 이거지. 저 작은 거미가 스타크 사를 완전 뒤집어 놨군.”
“…….”
짧은 말엔 늘 뼈가 있다.
하지만 노련한 사업가는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넘긴다. 그러면 다른 말이 붙진 않았다. 기장 기본적인 전술 지도를 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라 업스테이트는 밤늦게까지 북적인다. 어린애가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지치지도 않았다. 물론 평범한 인간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지만, 작정하고 훈련소로 내몬 것 치곤 바짝 따라오는 중이었다.
“다른 히어로들도 늘. 이렇게 훈련을 하나요?”
“응?”
“…뭔가 굉장히. 장난 아닌 거 같은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난 처음부터 실전에 투입되었지만.”
“…어. 그런 건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
하루종일 싸울 수도 있다던 캡틴과 옆에 붙은 블랙 위도우를 동시에 상대한다. 봐주는 부분도 있고, 미숙한 부분이 있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따라오는 건 분명 피터의 능력이 맞았다. 먼저 바닥에 누운 쪽은 피터였다. 더는 못하겠어요.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어린애를 보던 어벤져스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정말 노력했는데, 이 이상은 안 될 거 같아요.”
“왜? 아주 잘하고 있는데.”
“솔직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을 줄 몰랐거든요. 이젠 걸을 힘도 없는 것 같아요.”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다행이고 말이지.”
“아니. 훈련을 시키랬더니 이게 뭐 하는 일이야.”
캡틴의 방패를 들고 나타난 토니 스타크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찬다. 사방에 붙어있는 거미줄부터 미세하게 파손된 벽까지. 어지간한 재질이 아니면 이미 이 건물은 기둥부터 폭삭 무너져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바닥에 누워있는 녀석이 어딘가 익숙하게 본 느낌이었지만, 애써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캡시클은 이거 받고, 아니 애를 아주 완벽히 잡아놨네.”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했던 사람이 누군데 우리한테 이러실까.”
“제대로 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나지.”
“내가 저 녀석 몸은 지킬 줄 알아야 하니까 도와달라고 했지. 이렇게 굴리라고는 말 안 했어.”
“…….”
순간 수많은 눈이 토니를 향한다. 피터도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러지, 아마 슈트를 벗고 있다면 눈이 등잔만 하게 커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토니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진지해서 차마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토니 스타크가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던 사람이었을까.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타샤였다.
“저기. 토니 스타크 씨.”
“왜 또.”
“저기 누워있는 어린 거미가 우리보다 더 강한 메타 휴먼이라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는 거 맞아?”
“어린애라니까.”
“…….”
말이 안 통한다는 표정을 한 나타샤가 한걸음 물러섰다. 자발적인 콩깍지는 타인이 벗겨주기 힘들다더니. 지금이 바로 딱 그 꼴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눈엔 스파이더맨이 그냥 어린 남자애로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스파이더 보이라고 부르던가. 나타샤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피터였다. 허둥지둥 일어나서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 했지만, 잔뜩 혹사당한 몸은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털썩 주저앉은 채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낸다.
“그래도 예전보다 나은데요. 우주 갈 때 말이에요.”
“농담도 잘하는군.”
“정말인데, 이렇게 훈련하면 분명 좋은 일이 있겠죠?”
“…없는 편이 낫지만. 혹시 모르지.”
외계인이 계속 쳐들어온 횟수만 세어봐도 이후 더 위험한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로 보호막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에게 먹힐지도 알 수 없었다. 당장 타노스가 쳐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희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요. 멀쩡하다고요.”
“그건 다행이네.”
“아마 우리를 여기 부른 이유가 따로 있는 거 같네. 안 그래요. 캡틴?”
“그야. 모르지.”
토니 스타크 얼굴만 봐도 할 말을 안다고 했다. 나타샤는 일이 있어서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했고, 캡틴은 곧 와칸다로 넘어가 봐야 한다는 말을 한다. 저 인간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저 바쁜 인간들이 이곳에 얌전히 있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잠깐이나마 도움을 줬으면 된 거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무기 개량은 고마워. 훨씬 가벼운걸?”
“미운 놈 간식이라도 하나 더 주는 셈 치지.”
“허어. 그렇다 이거지. 캡틴도 미운 놈인가 봐?”
“밉기만 하겠어.”
이런 말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할 수 있으니 농담이 맞았다. 급히 떠난 나타샤를 배웅하고 온 캡틴은 와칸다에서 무슨 연락이 왔는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넓고 견고한 훈련실엔 작은 거미와 아이언맨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이제야 좀 호흡이 돌아온 모양인지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줄어든다.
“가면 벗어도 될까요?”
“나야 상관없는데, 네가 문제 아닐까.”
“…….”
“우리처럼 얼굴 내놓고 활동하는 쪽 하곤 다르지. 사실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몇 없긴 하지만.”
“캡틴은 아직 제 정체 모르죠??”
“그렇지.”
“안 되겠네.”
반쯤 가면을 벗은 채 앉아있던 녀석이 주변을 돌아본다. 사실 처음부터 토니가 데려왔으니 다른 사람이 피터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숙모를 위해서라도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캡틴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팔자 좋게 가면을 벗고 쉴 수도 없었다. 차라리 방으로 올라갈까 싶었지만, 밤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서 쉬어. 아마 내일 다들 떠나면 가상훈련 쪽으로 노선을 변경할 거니까.”
“…가상훈련이요?”
“그래. 새로 만들고 있는 프로그램인데, 일단 건물이 무너질 확률은 조금 더 낮아지지.”
“…….”
“왜 또 그런 표정이야.”
“만들고 있다는 게 제가 가장 먼저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말과 같은 걸까 해서요.”
“불안하다는 거네.”
“에이. 그럴 리가요.”
이제야 농담이 나온다. 조금 살아난 모습에 토니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돌아온. 캡틴이 토니에게 무엇인가 말을 전한다. 대충 무슨 일일지는 예상이 간다. 와칸다 쪽 일이겠지. 그쪽도 피해가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비브라늄으로 누구보다 강성한 나라를 꾸리고 있지만, 집요한 폭격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제대로 복구되지 않은 부분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일 것이 뻔했다. 그러면 당연히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할 텐가? 하루종일?”
“캡시클. 돌아왔네?”
“용건만 끝나면 바깥으로 다닐 일이 없으니까 말이지.”
“필요하면 온종일 해도 괜찮은데. 아마 저 녀석이 못 버틸걸?”
“제발 도와주세요. 캡틴.”
어린 거미가 죽는소리를 한다. 사실 잘 따라오기에 조금 더 몰아 부쳐본 것이 맞긴 했다. 하지만 저렇게 지친 아이를 억지로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캡틴이 허허 웃는 것을 본 피터는 그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꼭 어디서 본 광경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이게 더 힘든 것 같아요.”
“그건 아닐 텐데?”
“그땐 힘든 줄도 몰랐거든요.”
“놀라긴 했지?”
“네. 그렇죠.”
피터는 힘들어하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한다. 그런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막아선 토니 스타크는 이제 이 대화의 끝을 알린다. 두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친네도 밥을 많이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자네. 정말.”
“어린애는 많이 먹어야 잘 클 거고.”
“스타크 씨!”
“그렇다면 됐네. 난 오늘 같이 밥을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어때?”
“식사 초대치곤 제법 막말이라고 생각하네.”
“맞아요.”
“익숙하잖아.”
“…….”
“…….”
토니는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손가락을 튕긴다. 가벼운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업스테이트 본부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였다. 피터는 여전히 헉헉거리면서 바닥에 앉아있었고, 스티브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