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물론 그만큼 손책을 아끼니 하는 소리였지만 말이다. 병실에 감금된 채 몇 번이나 검사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퇴원을 하고 나서도 좀처럼 감시의 눈길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밥 잘 먹고 꼬박꼬박 집에 들어가고.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간신히 무술 연습을 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한 번만 더 쓰러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시퍼런 말을 애써 모른 척한다.
“근데 요새 기분 좋아?”
“응? 뭐가?”
“아니 얼굴에 좀 기분 좋다고 쓰여 있는 것 같아서.”
“어? 아, 뭐. 내가 그렇지.”
“그래. 오빠가 행복하면 된 거지. 그게 건강에도 좋대.”
“야, 상향아.”
“난 바빠서 이만.”
이럴 땐 손책도 이길 수 없다. 한참 정신없이 몸을 움직인다. 이럴 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잡음이 끼면 다치기에 십상이라 의도적으로 무술에만 집중한다. 팡. 엄청난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날아갔다. 곧게 뻗은 다리가 샌드백을 강타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컨디션은 쓰러지기 전보다 좋았다. 상처는 이미 아물어서 아주 약한 흔적만 남겼다.
“…….”
조조 생각이 날 때마다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이 간다. 손끝에 툭툭 걸리는 상처를 만지면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거기 왜 갔을까. 보통 때라면 특별히 걸어 다닐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꽤 일찍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당장 비키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왜 부상을 감수하면서 도왔을까. 조조 목소리가 크고 높았는데. 조조에 대한 온갖 자잘한 생각이 들 때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미쳤나.”
운동이 모자라서 이러는 걸까. 손책은 복잡한 마음을 운동과 무술로 씻어내는 것을 좋아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허리에서 손을 뗐다. 손끝에 뭔가 걸리지 않아야 이 복잡한 마음이 가라앉을 거다. 적어도 손책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딱 죽기 전까지 몸을 몰아 부친다. 땀에 푹 절여지고 나서야 힘에 부치는지 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
이대로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으면 한다. 손책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느리고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 좀 무리한 것이 맞았다. 이렇게 늘어져 있으면 또 동생들이 지나가다 한마디씩 잔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다.
“씻어야지.”
또 만날 수 있겠지. 적어도 이젠 조조가 먼저 도망치지 않는다. 미묘하게 가까워진 거리를 실감하던 손책은 혼자서 괜히 웃는다. 잠들기 직전 이번엔 조조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한 번쯤은 그 녀석이 먼저 연락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설핏 잠이 들었다. 손책이 바라는 소원이 꿈에 하나둘 박히기 시작했다.
“예?”
“…….”
“아뇨.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
“네?”
소원을 들어주긴 했다. 해가 막 넘어가려고 할 무렵 조조한테서 연락이 왔다. 핸드폰 액정에 찍힌 조조라는 이름을 한참 바라보던 손책은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설마 소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큼. 큼.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자연스럽게 대답을 할 새도 없었다. 물론 그다음에 들린 것은 낯선 목소리와 뒤에 깔리는 시끄러운 소리였다.
“다쳤다고요?”
“네. 근데 이 녀석이 도대체 주변 연락처를 알려주질 않아서 말입니다. 저장되어있는 번호가 몇 개 없어서.”
“…….”
“아이 쪽에 전화할 순 없는 노릇이라…….”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끊기기 전 조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손책의 마음이 급해졌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지.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연락이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긴 조조 성격에 초선이에게 전화를 할 리도 없었다. 부모 형제는 연을 끊고 사는 눈치였으니 더는 입을 대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쥐여준 번호가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허겁지겁 병원으로 들어간다. 예전 기억이 났다. 그땐 자신이 다치고 조조가 부축했었는데, 이번엔 반대였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이렇게 연락이 오는지. 온갖 안 좋은 생각이 흘러들어올 때마다 애써 부정했다. 조조는 그렇게 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왜 왔어.”
“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많이 다친 것도 아니다.”
“…….”
“정말 누굴 일곱 살 먹은 어린애 취급이나 하고.”
“너…….”
“충분히 걸어서 돌아갈 수 있어. 다리는 다치지도 않았고, 머리를 부딪친 것도 아니다.”
“…….”
“내가 정말.”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침대 헤드를 짚고 주르르 주저앉았다. 갑갑하게 뭉쳐있던 걱정이 입술을 타고 왈칵 넘어왔다. 조조는 그런 손책을 보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손책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조조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그게 뭐냐.”
“…….”
“멍에 다 까져서.”
“경찰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치게 되는 일이 많다.”
“그걸 누가 몰라서! 됐다. 그만하자.”
“그래도 와줘서 고맙다. 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왜?”
“뭐?”
조조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손책은 어느새 일어나서 조조를 살핀다. 꼭 자신한테 해줬던 걸 똑같이 할 모양인지 이리저리 옷을 헤집는다. 그런 손길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조조였다. 손책이 다쳤을 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여기저기 더듬거렸는데, 막상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자 눈에 보이게 동요한다. 오른팔은 얼마나 다친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깁스를 둘둘 말아서 보조 팔걸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뭐하다가.”
“…알 거 없어.”
“이거 피잖아. 이 꼴로 지금 멀쩡하다고 할 셈인가?”
“그냥 묻은 거라니까.”
“너 정말.”
조금 목소리가 높아지려 할 때 경찰 동료인 듯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이가 있어 보이니 선배겠지. 손책은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조조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지만, 말릴 수 없었다. 방금까지 다 잊었던 고통이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친구가 다쳤다는데…….”
“혼자 보내기 걱정스러워서 말이야. 아…저번에.”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입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말을 섞는 손책의 발목을 퍽 걷어찼다. 아야야. 손책이 얼굴을 찡그리며 조조를 돌아본다. 빨리하고 꺼지라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럴 때 괜히 시간을 잡아먹으면 안 먹을 욕도 덤으로 먹을 수 있다. 손책은 이런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잘 알았다.
“제가 데려다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거 고맙습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그럼…….”
“…뭐.”
“빨리 일어나라니까. 일단 나가자고.”
“…….”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팔을 붙잡고 부축한다. 조조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일어난다. 병원까지 나오는 동안 점점 험악해지는 표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봐서 당장 한 대 치고 싶을 수도 있었다. 손책은 다친 사람을 부축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
“…….”
겨우겨우 직장 동료와 아는 사람이 없는 곳까지 걸어왔다. 휙 돌아보는 조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야. 야. 잠깐만. 손책이 두 손을 들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한시도 방심을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조조의 표정이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먼저 다가갔다.
“그래도…걱정되잖아.”
“내가 내 직장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전화까지 왔는데…매정하게 그런 사람 모른다고 하냐.”
“…….”
“어떻게 그래.”
“그게 뭐 대수라고…….”
“대수로운 일 아니고. 나한텐 중요한 일이야.”
“…….”
“네 신변에 일이 생겼다는데 어떻게 그냥 넘기겠어.”
“헛소리…하지 마.”
“데려다줄게.”
“됐다니까.”
“그 꼴로?”
“가자.”
조조는 손책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고, 모든 관계가 삐걱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무서웠다. 꼭 한 번에 사라질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밀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손책은 늘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태양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시선이 가는 방향으로 곧게 쳐다볼 뿐이었다. 그 눈에 들어온 사람이 조조였고, 한눈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까진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필연이었고, 인연이 되었다.
전혀 다른 성질의 둘이 만나서 기묘한 광경을 만들었다. 서로 섞이고 싶어 하면서도 멀어진다.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애초에 살아온 환경이 달랐다. 따뜻함을 찾는 겨울은 활활 타는 태양에게 기꺼이 자신의 차가움을 내려놓았다. 둘이 섞으면 봄이 올까. 아니면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식어버릴까.
이 끝은 둘조차도 모르는 미래의 일이었다.
**
“씻는 거 도와줄게.”
“됐다.”
“한 손으로 하려고? 옷에 묻은 걸 봐서 난리일 텐데.”
“그런 거 상관…….”
“머리만 도와줄게. 지금 완전 엉망이라니까. 이 상태로 도원관에 가면 애들 여럿 울리겠어.”
“…….”
“옷부터 벗어봐.”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조조는 한참 입을 다문 채 손책을 노려보았다. 하긴 스스로 생각해도 꼴이 엉망이었다. 범인을 잡으려고 뛰어나가다 하필 범인이 밀친 자전거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구르면서 팔을 심하게 다쳤다. 게다가 몇 번이라 땅바닥을 굴러서 온몸에 생채기가 났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얼굴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날카로운 돌조각에 긁힌 곳엔 커다란 거즈를 댔다. 광대뼈가 욱신거렸다. 당장 눕고 싶은데, 그러기엔 꼴이 너무 더러웠다.
“…….”
“왜 우리 친한 사이하자며.”
“…….”
“뭘 그렇게.”
“너…정말.”
“빨리 도와주고 간다니까. 아니면 아예 여기 자리 잡고 앉아서 깁스 풀 때까지 도와줄까?”
“사양하겠어.”
이런 말엔 대답이 빠르다. 조조는 이 귀찮은 짐승을 내보내기 위해선 하자는 대로 잠깐 어울려주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옷을 벗으려 했는데, 깁스를 하니 그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팔걸이를 빼고 끙끙 소리를 내며 옷을 벗었다. 찢어지고 피가 묻은 셔츠는 이미 병원에서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얇은 니트 하나 걸쳤을 뿐이라 벗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거봐. 혼자 하면 아무것도 못했을 거라니까.”
“농담 그만해.”
“이게 농담으로 들려?”
“…….”
“가자. 그래도 씻고 누워야 좀 낫지.”
욕실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자꾸 재촉한다. 조조는 한숨을 쉬면서 앞장섰다. 겨우 이 집에 한 번 들어왔을 뿐인 녀석이 뭐 저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알 수 없어서 그냥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욕실 문을 열어주자 손책이 냉큼 들어간다.
“물이 닿으면 안 되니까.”
“…….”
“이걸로 깁스 감고 허리만 숙이고 있으면 된다.”
“역시…내가.”
“자, 자. 빨리 끝내자고.”
무슨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조조는 눈을 찌푸리면서 수건을 받았다. 뭐에 씐 것처럼 시키는 대로 깁스 위에 수건을 덮었다. 욕조 가까이 오자 손책은 물 온도를 가늠하던 손을 저 멀리 쭉 뻗었다. 따뜻한 김이 욕실에 몽글몽글 차오르기 시작한다.
“숙이라니까?”
“…….”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지 마. 내가 이렇게 보여도 동생들 키우면서 자랐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가지 않아.”
“…….”
“내가 정말 어딘가 망가진 것이 분명해.”
조조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몸은 남에게 맡겨본 적이 없었다. 죽을 만큼 아파도 혼자 이겨냈고. 이렇게 다치면 어떻게든 아득바득 주위에 알리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주위엔 자신이 다쳐도 걱정해줄 사람은 없었고, 괜히 걱정이 늘어날 사람만 가득했다. 그런데 왜 이 녀석 앞에서는 하자는 대로 다 하게 되는지. 조조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뜨거우면 말하고.”
“…….”
“눈감아. 거품 들어간다.”
“…….”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빌었다. 따뜻한 물이 정수리부터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깊고 얇게 긁힌 상처에 물이 들어가자 따끔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 티를 낼 생각은 없었다. 물줄기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턱에 맺혔다가 주르륵 떨어진다. 따뜻한 물로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덜어내서 조심스럽게 거품을 낸다. 머릿속에도 상처가 있는 모양이었다. 툭툭 걸리는 아픔이 느껴졌다.
“괜찮아?”
“…….”
“괜찮지? 빨리 끝낼게.”
“…….”
고개를 약하게 끄덕인다. 샤워기를 다시 들고 거품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퐁퐁 올라오는 익숙한 향기가 코를 스친다. 잔뜩 긴장한 몸에 따뜻한 물과 공기가 닿자 순식간에 졸음이 밀려왔다. 커다랗고 굳은살이 배긴 손이 나름 섬세하게 머리카락을 헤집으면서 거품을 털어냈다. 거품이 물줄기에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헹군다. 거품이 타고 내려오는 부분마다 상처가 있어서 알싸하게 아팠다.
“잠깐만.”
“…….”
“수건 좀 가져와서.”
큰 수건을 머리에 푹 덮어쓴 꼴이 된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털어내곤 이제 허리를 펴라고 웃었다. 아무리 봐도 멍청한 놀음이었다.
“머리도 마저 말려줄게.”
“난 당장 내일 병원에 가야겠어.”
“…왜? 아픈가?”
“내가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농담은…….”
“…….”
조조는 그제야 팔에 감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뿌연 김이 서린 거울 가운데 흐릿한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거울 속의 조조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지금 날 보면 뭐라고 할까. 잡념은 물줄기와 함께 흘러가길 바랐지만, 그리 쉽게 사라질 물건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지금 머릿속은 아주 깨끗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조조의 아쉬움이 욕실에 뚝뚝 떨어졌다.
“그건 내가 해.”
“가만있으라니까. 강동의 호랑이를 믿어.”
“정말…못 믿을 말만 골라 하는 군.”
“뜨거우니까 눈 감고 있어도 좋고.”
“…….”
어디서 찾아왔는지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싱글벙글 웃는다. 내가 저걸 쓰고 아무 데나 던져뒀었나. 아니면 저 녀석이 코가 발달한 건가. 조조는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기로 했다. 침대에 걸터앉자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작고 짙은 얼룩을 만들면서 뚝뚝 떨어졌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조조는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
“…….”
시끄러운 모터 소리가 침실에 울려 퍼진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단번에 말라간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정수리를 헤집던 손이 어느새 뒷머리를 말린다. 조조는 그 손길이 꼭 누구와 비슷하단 생각을 한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니 다시 생각하니 전혀 닮지 않았다. 활활 타는 손바닥이 지나가는 곳 마나 빨갛게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았다. 앞머리를 말리는지 뜨거운 바람이 눈꺼풀에 느껴졌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뭐야.”
“…….”
“너.”
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드라이어가 꺼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손책이 조조의 입술을 쓸었다. 그러더니 입술에 입술을 겹친다. 놀라서 굳어버린 조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쪽 팔은 대차게 다쳤고, 다른 손은 손책이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불덩이 같은 입술에 차가운 피부가 닿았다. 사람이 이렇게 차가운 줄 알았으면, 좀 더 따뜻하게 해줬을 텐데. 손책은 조조의 입술을 맛보여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조조의 눈이 커진다.
“…….”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책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보송해진 머리카락 밑으로 길고 창백한 목이 보인다. 손책을 자신도 모르게 조조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그리고 끌어당겨서 품에 안았다. 졸지에 남자 품에 안긴 조조는 팔이 틀어질까 봐 멋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팔…….”
“잠시만.”
“…….”
“좋아해. 조조.”
“…….”
“내 심장이 역시 널 좋아하는 것 같아.”
“…….”
호랑이의 눈빛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을 여기에 쓰면 되는 걸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담은 눈동자가 조조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다. 손책이 코가 목덜미에 닿았다. 꼭 뭔가 새기는 것 같았다. 조조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받아도 되는 걸까. 세상을 재미없이 살아온 조조는 이런 쪽에선 약간 느린 편이었다.
“넌 어때?”
“난…모르겠어.”
“싫진 않지?”
“…….”
“그럼 됐다.”
조조는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이 정도로 됐다니. 정말 괜찮은 걸까. 하지만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해야 하는데, 그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내가…이런 걸 잘 모른다.”
“알아. 그걸 포함해서 좋아한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도 아니야.”
“그렇지 않다.”
“…….”
“난 알아.”
“…….”
“알 수 있다. 충분히 느낄 수도 있고.”
“정말…바보 같아.”
그럴지도 모르지. 손책이 품에서 조조를 떼어낸다. 조조의 화법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조조는 한쪽 팔이 망가진 초라한 모습을 하고 눈앞의 호랑이를 바라본다. 우린 어디가 닮았을까. 조조는 정말 알고 싶었다.
“그래서 널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
이번엔 손책의 두 손이 볼에 닿았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입을 맞춘다. 천천히 꼭 잡아먹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이대로 심해로 떨어진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영원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흐물흐물 녹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가빠지면 입술이 떨어져 나간다. 그러다 다시 붙어왔다. 입술이 퉁퉁 부을 거 같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쯤은 조조도 상관이 없어진다. 조조의 입술이 조금 열린다. 그리고 한참 감고 있던 눈이 조금 휘어지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키만 멀쑥하게 큰 아이는 입이 붙었는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그 앞에 있는 남자는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며 아이를 달랜다. 나이 차이를 따져 봐도 족히 십년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둘은 이질적이기만 했다.
“일단 들어가자.”
“저 지금 아저씨한테 인생 상담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
“내 결정을 통보하러 온 거지. 그런 거 아니니까 저 설득 할 생각은 그만두세요.”
“태오야.”
“…….”
“커피 괜찮지?”
“…….”
“일단 좀…여기서 서서 이래 봤자 되는 일이 아니잖아.”
“…….”
눈앞에 서 있는 아이는 키만 불쑥 자란 콩나물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컸을까.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마주치게 된 건 언제부터지. 왕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얗게 뜬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간신히 눈썹을 가리며 표정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당돌한 말투와 달리 아이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가자.”
“…….”
“여기서 나 따라 안가면 다시는 나 볼 생각이 없는 줄 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
“어서.”
왕윤이 짐짓 엄하게 말한다. 교복 위에 코트에 목도리까지 한 녀석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서렸다가 다시 사라졌다. 왕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먼저 돌아섰다. 조금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던 녀석은 입술을 쭉 내린 채 따라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반항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럴 땐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겨울은 해가 금방 진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그것도 모자라서 금방 눈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우중충했다. 그런 하늘 아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 둘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나무는 이미 나뭇잎이 죄다 떨어져서 황량하기만 하다. 발끝에 툭툭 차이는 낙엽은 바짝 말라서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뒤따라가던 아이는 괜히 심술을 부리면서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을 찼다. 바삭. 거리에서 며칠 동안 굴러다닌 낙엽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
아이는 제풀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꼭 이럴 때만 소리가 시끄럽게 나곤 한다. 한마디 하면서 방문을 닫았는데 쾅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았다. 하얗게 들뜬 얼굴이 앞서가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용히 한숨을 쉰 아이는 급하게 왕윤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심장이 덜컹 덜어지는 아이는 혼자서 사고를 열심히 치곤 했다.
**
“커피 괜찮아?”
“…….”
“태오야.”
“…네.”
“그럼 알아서 시킨다?”
“…….”
당장 눈을 뿌릴 것 같은 날씨가 영 못 미더워서 억지로 카페에 끌고 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기다렸다는 듯 눈이 퍼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뚱하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는 그런 상황이 오거나 말거나 그저 구석에 자리 잡고 의자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왕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꾸 한숨을 쉬었다.
“눈이 오네.”
“…….”
“태오야.”
“…….”
“일단 시키고 와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
커다란 눈송이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펑펑 내리기 시작하자 간신히 빛이 들던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빽빽하게 낀 두꺼운 구름이 짧은 해를 가렸다. 태오는 그런 광경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다. 왕윤이 알아채지 못하게 바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꼭 이 날씨가 자기 처지인 것 같았다.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꼼꼼히 두른 채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가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린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면 어두워졌지, 날씨가 갤 것 같지는 않았다. 왜 하필 이런 날 날씨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 울적해졌다. 차라리 날이라도 맑았으면 생전 처음 왕윤에게 떼를 써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 일단 좀 마시고.”
“…….”
“태오야. 우리 천천히 이야기 좀 하자.”
“그…….”
“아까 한 말이 사실이야?”
“…….”
“어렸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
“가끔 이런 널 볼 때마다 늦은 사춘기가 온 건지 걱정이 된단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왜.”
“…제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정했을 뿐입니다.”
“…….”
“집안에서 정해준 미래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리고…….”
“태오야.”
왕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태오는 그런 목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납처럼 무거워서 한번 들으면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어릴 때 들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태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눈치를 보곤 했다.
“난…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막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
“너랑 내가 가족도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하겠니.”
“…….”
“그런데 말이다.”
“…….”
“그저 내 뒤를 쫓아서 그러는 거라면 좀 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거야.”
“아저씨…….”
“넌 어릴 때랑 하나도 안 변했어.”
“아저씨도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
“왜 자꾸 저한테 거짓말하세요.”
“뭐?”
왕윤이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찰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앉은 녀석은 당돌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뿔이 났는지 알아봐야 했다. 왕윤은 속으로 불안함을 꾹꾹 눌렀다. 안 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이러는 건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경찰이고 누군가를 상담해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슬아슬한 녀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
“잘 참았다. 이제 다 괜찮다. 그렇게 말 하셨잖아요.”
“그거야…….”
“그때부터 아저씨만 봤어요.”
“…….”
“집에서 검사해라. 판사를 해라. 말이 많았는데,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차피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아저씨랑 같은 직업을 가져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유학이니 뭐니. 안 하겠다 하고 쫓겨났고요.”
“…넌 정말 어릴 때랑 똑같냐.”
“부모님이 유산 미리 떼어 줄 테니 알아서 살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랑 다른 친척분들한테도 말이 들어가서 이젠 다른 일도 할 수 없을 거고요.”
“…….”
“아저씨한테 책임지라고 하고 싶었어요,”
“…….”
“맞잖아요. 아저씨 때문에 경찰이 될 거니까. 기다려 달라고.”
“…….”
“선배로 부를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려 했는데…아저씨는 자꾸 나보고 어리다고만 하잖아요.”
“태오야.”
“아저씨는 내가 후배가 되는 것이 싫어요?”
“…….”
당돌한 말이었다. 물론 태오는 똑똑해서 왕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왕윤과 친해지면서 태오에게 뭔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얻어맞았는지 벌건 뺨을 달고 찾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에 전화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끊어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사춘기일 거라고. 어린 날의 치기 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싫으면 지금 이야기해요. 나 그만둘 거니까.”
“네 미래를 이렇게 정하면 안 돼.”
“왜 안 되는 거죠?”
“…….”
“집안의 꼭두각시처럼 공부해서, 검사가 되고.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휘둘리는 건 더 싫으니까요. 어차피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아저씨랑 같이 악을 없애는 편이 나아요.”
“…….”
물론 경찰이 되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태오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굴었다. 왕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런 어린 진심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까. 그저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보라며 밀어내는 것만 괜찮은 방법일까.
왕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의도적으로 못 본 척 한 것도 많았다. 그저 어릴 적 힘들었을 때 기억이 남아 자신을 잘 따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태오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왕윤의 얼굴에 슬쩍 그늘이 졌다.
“난 계속 아저씨한테 말하고 있었어요.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것처럼 생각했고.”
“…….”
“집안에서 나한테 정해준 미래를 박차고 나올 때도 아저씨를 생각했어요,”
“…….”
“아저씨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참았는데…자꾸.”
“태오야. 나 좀 봐라.”
“…….”
“응?”
“…….”
벌겋게 뜬 눈이 보인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왕윤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태오는 여전히 두 손으로 종이컵을 꽉 쥔 채 손끝으로 긁어댔다.
“난 솔직히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내가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고맙지만, 경찰은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되는 직업이야.”
“…….”
“만약 지금의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채 경찰이 되었다고 하자.”
“…….”
“아주 불운하게. 나와 범인 둘 중의 한 사람의 목숨만 살릴 수 있어. 그러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야.”
“날 선택하면 안 돼.”
“…….”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모습을 모른 척했다. 심장에 툭툭 박히는 아픈 말을 이어갈수록 아이의 얼굴의 웃음이 사라진다. 금방이라도 푹 꺾일 것 같은 모습으로 울지도 못하고, 왕윤이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달프게 바라보았다.
“경찰이란 그런 거야.”
“…….”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네가 지켜야 할 사람을 생각해야 해. 그리고 날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고.”
“…….”
“근데 지금의 넌 그게 안 될 거 같아서 그러는 거야.”
“…….”
“네가 소중해서 그런다. 내가 구해냈고, 지금까지 자라는 것을 봤어.”
“…….”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태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만 꾹꾹 삼켰다. 왕윤은 저 아이에게 저렇게 깊은 슬픔을 받아주기 힘들었다. 학교 쪽으로 지나쳐 갈 때 태오를 몇 번 본 적 있었다. 친구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냉한 얼굴을 하던 녀석은 자신 앞에선 다시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웃었다. 그런 녀석을 언젠간 괜찮아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금까지 방치한 것은 자신이었다. 조금은 책임이 있어서 지금이라도 단호하게 밀어내야 했다. 아이는 늘 사랑에 굶주려서 허덕였다. 그래서 더 왕윤을 놓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왕윤은 자신의 결혼식에 왔던 태오를 기억했다.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하얗게 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농담 삼아 부케를 네가 받으라고 했었다. 순식간에 지나친 얼굴이었지만, 태오 얼굴에서 진심을 보았다. 그리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결혼 축하드려요. 아저씨. 낮고 어린 목소리 끝에 다른 종류의 애정이 묻어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척했었다. 왕윤은 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건가요?”
“물론이지.”
“…….”
“넌 아직 어려. 나한텐 꼬맹이야.”
“…그렇지만 지금 떼를 쓰면 다 컸다고 혼낼 거죠. 다 알아요.”
“들켰나? 하하하.”
“아저씨는 농담도 못 하고, 거짓말도 못 하고.”
“…….”
“그래서 좋아해요.”
“…….”
“나중에 봐요. 커피 잘 마셨어요.”
“…그래.”
태오는 벌떡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약간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속으로 숨겨버린 것 같기도 했다. 왕윤은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다 저 아이가 언제 저만큼 컸지. 너무 어릴 때 봐서 그런지 꼭 자기 자식같이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까지 말했으니 아이는 알아듣겠지. 저 녀석이 고집은 좀 세지만 똑똑하니까. 너무 심한 말만 골라 한 것 같았지만, 한 번쯤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왕윤은 이례적으로 경찰대에 엄청난 성석으로 수석 입학한 녀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멀끔하게 경찰 제복을 입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순간, 깨달았다. 태오 저 녀석은 아직도 하나도 철이 들지 않았다.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뛸 거라면 차라리 왕윤이 거둬서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가르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었지만, 이렇게 좋은 날 굳이 저 녀석에게 한마디 엄한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
“…….”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돌아서 다시 겨울이 왔다. 텅 비어버린 심장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 심장을 잡고 그대로 뜯어낸 것 같았다. 그 날처럼 눈이 왔다. 남자는 품 안에 안은 꽃이 뭉그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바람이 차갑게 온몸을 파고들었다.
“선배.”
떠난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다. 한 번쯤은 대답을 해줄만도 한데, 이 세상에 듣고 싶은 목소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조는 한참 동안 죽은 것처럼 살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심장이 뜯기는 것 같아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주먹으로 두들겼다. 하지만 이 고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선배는 이걸 유비한테 주라고 하셨죠.”
한 손으론 국화꽃을 들고, 다른 손엔 칠보검을 들고 있었다. 꼭 긴 어둠을 헤쳐 나온 것처럼 옛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병이 걸린 건가 싶어 병원도 여러 번 찾아갔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통은 조조를 파고들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다 보면 기억이 한 조각씩 떠오르곤 했다. 조조는 그럴 때마다 급하게 일기장을 찾았다. 아니 일기장으로 할 수 없을 만큼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공책이었다. 하나씩 적다 보면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일기장이 한 권이 되고 다시 두 권이 되었다. 같은 말을 여섯 번쯤 반복하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연속으로 적혀있기도 했다. 조조는 혼란한 기억 속에서 왕윤을 찾았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서랍 속에 들어있는 칠보검 생각이 났다.
“그거…어디 있더라.”
조조는 미친 사람처럼 짐을 뒤졌다. 어디다 넣어놨는지. 손톱이 뚝 부러질 정도로 찾았다. 겨우 손에 쥔 칠보검은 바뀐 것이 없는데, 그저 주인만 자리에 없었다. 가만히 검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왕윤은 이걸 유비에게 전해달라고 했고. 같이 싸우라고 말했다.
어째서?
조조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칠보검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자꾸 저릿하게 아파졌다. 잉크가 여기저기 번진 일기장엔 간신히 찾아낸 기억이 가득한데, 거짓말처럼 선배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일기장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기억과 과거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선배는 이걸 유비에게 전해달라 하셨지만, 그러지 않으려고요.”
조조는 왕윤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아프게 웃었다. 조조는 왕윤의 장례식도. 추모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들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 눈치였지만, 조조 앞에서 감히 왕윤의 일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하던 걸 모두 거절하고 겨우겨우 찾아왔다. 교복을 입은 채 목도리를 둘둘 말고 왕윤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제 훌쩍 커서 상복을 입고 왕윤을 찾아왔다.
“저 여전히 말 안 듣죠?”
그럴 거로 생각해요. 조조는 이제야 왕윤의 이름을 똑바로 바라본다. 어떻게 된 건지 좀 더 알아봐야 했다. 선배가 왜 죽었는지. 나는 뭘 했는지. 그리고 유비는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칠보검을 내놓지 않고 싶었다. 그래도 이건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내놓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우승자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는 드림배틀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렸다. 배틀을 시작하던 순간과 가장 어긋나지 않은 방향으로 그간 기억이 조절된다. 몇몇은 그런 자신의 상황에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진 않았다.
“…….”
그런 모든 사람의 소원을 관리하는 신선은 늘 바빴다. 삼백 년에 한 번씩 큰 꿈을 받는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쪽을 택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소원을 모아 옥새를 운용해야 한다. 신선이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일이기에 지겹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신선에겐 시간이란 개념이 없다. 그들의 삶은 드림 배틀로 시작해서 끝난다. 그것이 신선의 일생이었고, 다음 드림 배틀을 위해 끝없는 잠을 청하곤 했다. 아무도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기에 제갈량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몇 년은 괜찮았던 것 같았다.
“…주군,”
하지만 어느 순간 단단한 심장에 균열이 생겼다. 신선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도 괜찮다. 잠을 잘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은 드림 배틀을 하는 데 필요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만들어졌다.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신선마다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심장은 모두 비슷했다.
“전 어쩌면 좋을까요.”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신선계는 사시사철 좋은 곳이었다.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 있었고, 필요하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도 지천에 널려있었다. 추위가 없는 곳이기에 풀밭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여도 충분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제 제갈량뿐이었다. 옥새가 움직이지 않으면 해가 지지 않는 곳은 늘 따뜻했다. 인간계에서 처음 경험해본 밤은 어둠과 같았다. 그런 곳에서 조금 살았다고 항상 밝은 이곳이 어색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만나고 싶습니다.”
제갈량은 어떻게든 움직이고 싶었다. 하다못해 유비의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 심장이 고장 났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을 고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젠 너무 당연해진 그리움은 심장에 뿌리를 박고 자랐다. 줄기가 온몸을 타고 내려올 때까지 제갈량은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옥새 관리자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헤어질 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것이 인간으로 살아갈 주군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과 신선의 삶은 함께 갈 수 없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 끝나는 그때가 되어도 신선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마음을 쉽게 놓지 못한다. 그리움이란 것은 살아있는 생명과 같다. 인간은 서서히 과거를 잊어가지만, 신선은 그렇지 못했다. 영원히 기억 속에 박혀서 그리워할 사람이 모두 죽고 나면 어떻게 버텨야 할까. 제갈량은 신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약간의 부채감을 심었다. 가족. 친구. 기억. 이런 말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성하고 있다. 신선이란 그런 사사로운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옥새를 개조해야 했다.”
나의 주군이, 저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엄청난 말이었다. 물론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대에 태어난 신선은 모두 죽었다. 한 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 않았을까. 제갈량은 옥새를 바라보았다. 이젠 자신과 동화되어 움직이는 옥새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물론 옥새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신선조차 모르는 기능이 남아있었다.
“날…버그로 여길 수도 있겠구나.”
사실 개조라는 것조차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제갈량을 버그로 인식하게 되면 옥새부터 망가질 것이고, 그것은 신선계와 인간계 모두에게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이후 드림 배틀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갈량의 결심은 개인의 이기심에 가까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물론 당장 옥새를 뜯어고치고 싶었지만, 제갈량은 그렇게 큰일을 멋대로 벌인 성경이 아니었다. 천천히 장각이 만든 설계도를 꺼내온다. 조금씩 고치면 몇 년 안에 완성이 될 것이다. 그저 그 시간 동안 유비가 무사하길 빌었다. 인간의 생은 하늘이 관장하는지라 신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냉정했다.
“곧 가겠습니다.”
제갈량의 결심이 점점 굳어간다. 지금은 옥새에 매인 몸이지만, 희망이 보였다. 현 관리자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 보면서 파고 들어가는 성격이었다. 제갈량이 옥새를 뜯어보는 동안 신선계엔 밤이 오지 않았다. 늘 환한 것이 싫어 억지로라도 밤을 만들던 것조차 잊은 채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
“주군.”
“…제갈량?”
“오랜만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삼 년이나 지났어.”
“…….”
“다신 못 볼 줄 알았는데…….”
“삼 년이나 걸리다니, 누군가 들으면 웃겠군요.”
“…응?”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혹시 어딘가 아프신 곳은 없으신가요? 제가 없다고 무술 연습을 게을리하신 건 아니겠죠?”
“아니야. 나 건강해. 정말이야.”
“…….”
“진짠데…….”
유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잠시 입을 다물면 거짓말처럼 시무룩해진다. 조금 키가 자란 걸까. 눈높이가 약간 달라졌다. 신선은 가장 최적의 신체 상태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기에 인간의 변화는 늘 흥미로웠다.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보고 웃었다.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은 여전히 듣지 않는다. 늘 입던 옷과 도복. 그리고 비슷한 머리 스타일.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벌써 삼 년이나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
“예?”
“그때…다시 못 만난다고 해서.”
“그랬었죠.”
“혹시 신선계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
“내가 소원을 빈 게 역시 잘못된 일이었을까? 응? 제갈량. 대답 좀 해줘.”
“그럴 리가요. 신선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저부터 이미 죽고 없겠지요. 이렇게 맘 편히 어디로 놀러 다니겠습니까.”
“…….”
유비는 또 자신이 바보 같은 말을 했다며 웃었다. 들고 있던 장바구니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주군. 저기 감자가 굴러갑니다. 제갈량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비는 장바구니를 정리한다. 아. 이거 깨졌다고 공손찬한테 혼나겠다. 잔뜩 입술을 내민 채 떨어진 것을 주워 담았다.
“왜 저만 보면 이렇게 허둥지둥하십니까. 전 주군을 혼내러 온 것이 아닙니다.”
“…….”
“그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날…보고 싶어서?”
“네.”
“옥새는…….”
“저 위에.”
제갈량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 손가락을 따라 올려다보니 해가 쨍쨍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 유비가 눈을 찌푸린다. 제갈량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물론 알아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예. 전 선계 최고니까요. 장각이 남긴 자료를 조금 더 찾아서 개조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이상이 없으니 멀쩡하겠지요.”
“하지만…….”
“주군이 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쓸쓸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매일 소원을 빌었는데.”
“하지만 제 앞에 계시지 않으니까요.”
“…….”
제갈량의 웃음 끝엔 슬픔이 녹아났다. 유비는 그런 제갈량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단 집에 가자. 가서 이야기하자. 응? 예전 같으면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갈량은 살짝 웃으면서 유비를 따라간다. 익숙한 길이 보이고, 낯익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바뀐 것이 없는 도원관은 조용했다. 분명 아이들을 많이 가르쳤던 거 같은데…주변은 둘러보자 유비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지금은 다들 방학이야.”
“네?”
“노식 사부님도 일이 있고, 공손찬도 바빠서 말이야. 차라리 잘된 일이지.”
“…….”
“잠깐만 닫았다가 방학이 끝나면 다시 열어야지.”
“그러면…….”
“지금은 나 혼자 있어. 그래도 오늘은 제갈량이 와서 좋다. 공손찬 요새 바빠서 얼굴도 못 보고 있어. 전공이 잘 맞나봐.”
“…….”
제갈량은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비는 드림배틀이 끝난 인간계에선 이질적인 존재였다. 물론 그것이 우승자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사실 예전 드림 배틀 우승자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유비의 소원으로 드림 배틀이 없어진 지금 인간계와 선계는 다음 드림 배틀에 매이지 않고 영원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걸 모두 기억하고 있는 유비가 문제였다. 인간의 삶은 거의 비슷하다. 오래 산다는 사람도 채 이백 년을 살지 못한다. 우승자라고 다른 건 아니었다. 노식 사부처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는 건 유비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유비는 아니었다. 드림 배틀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인간계에 살고 있으니 꼭 발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을 테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과 유리된다.
“주군. 제가 와서 기쁘신가요?”
“당연하지.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
“알겠습니다.”
“잠깐만? 내가 이럴 줄 알고 오늘 비장의 소시지를 준비했거든.”
유비가 신나면 자신도 기분이 좋다. 군주와 신선이 감정적 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지만, 애초에 유비와 자신은 약간 특별한 존재였다. 그럴 수도 있지. 옥새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제갈량은 자신의 심장에 자라난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언제 돌아갈 거야?”
“하룻밤 지나면 돌아가야지요. 아직은 오래 비우지 못하니까요.”
“…그렇구나.”
“왜 그러십니까.”
“아니 좀 더 오래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
“또 내려오겠습니다. 전 인간계에 주군 외엔 적이 없으니까요.”
“정말? 그럼 어서 밥부터 먹자.”
“예.”
제갈량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유비를 눈 속에 빠짐없이 담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선에게 처음 모시는 주군은 특별한 존재였다. 영원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뒤쫓고 싶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제갈량의 눈에 약간 다른 색이 섞여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인간계에 머무르는 동안 늘 보던 밥상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저 주변 환경뿐이었다. 유비는 이거 다 먹으라면서 자꾸 제갈량 앞으로 반찬을 밀어줬다. 신선은 그저 맛을 즐기기 위해 선택적으로 음식을 섭취한다는 말은 아무리 해도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 조차 좋았다.
“신선도 잠을 자?”
“필요하면요.”
“그럼 같이 잘래?”
“…네?”
“내 방 침대 좁긴 하지만…아마 괜찮을 거야.”
“…….”
“내일 돌아간다며. 응?”
“알겠습니다. 오늘은 주군이 원하시는 걸 모두 하시죠.”
“정말 좋다. 그렇지 제갈량?”
차마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유비가 하자는 대로 침대에 같이 누웠다. 강아지 같은 얼굴로 웅크리고 누워서 자꾸 보채기만 한다. 모른 척 옆을 돌아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웃었다. 주군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생각하면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유비는 제갈량이 금세 사라질까 봐 얼른 손을 잡았다. 그러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허리를 꾹 껴안은 채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 자고 있는데 먼저 가면 안 돼?”
“알겠습니다.”
“이번엔 늦잠 안 자고 일어날게.”
“주군이 일어나실 때까지 떠나지 않겠습니다.”
“정말이지?”
“네. 약속하겠습니다.”
제갈량은 품 안에 안긴 주군을 떼어내는 것보다 재우는 쪽을 택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서 등을 두드린다. 토닥토닥 규칙적인 소리가 들린다. 유비는 자꾸 자지 않으려 했지만, 졸음의 무게를 버틸 수 없었다. 그런 유비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제갈량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내 꿈은 이미 인간계에 있는데, 옥새는 어째서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명한 걸까. 가서 행복해지라 한 말은 뭐였을까. 제갈량은 억울했다. 평생 도구로 살지 않으려 버티다 처음으로 찾은 꿈이고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의 유한함을 알게 되니 참을 수 없었다.
“인간은…다시 태어난다지만.”
“…….”
“신선은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옥새가 무사히 돌아가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으응.”
“그래서 유비 님, 주군. 당신을 놓을 수 없습니다.”
전 어떡하면 좋을까요. 이 어려운 질문에 확실한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제갈량은 유비를 품에 안은 채 꼬박 밤을 보냈다. 이불이 흘러내리면 다시 덮어주고, 웅얼웅얼 잠꼬대하면 받아준다. 유비의 모습이 꼭 어미와 떨어진 강아지 같아서 한시라도 품에서 떨어뜨릴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규칙적인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제갈량.”
“…….”
“…잘…잤어?”
“…….”
“제갈…….”
유비는 쏟아지는 햇살에 못 이겨 눈을 떴다. 자연스럽게 옆으로 손을 뻗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곳을 손으로 더듬는다. 분명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제갈량.”
어디 갔어. 너무 놀라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평생 찾아오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변색하고 사라지는데, 제갈량은 그것조차 섭리에 따르는 것을 놔두지 못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웃으면서 들어와 이렇게 버리고 가다니. 유비는 벌벌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사실 이 모든 게 꿈일지도 몰랐다. 빨리 방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군…일어나셨…….”
“제갈량!”
“…무슨 일이십니까. 왜 울고 그러세요.”
“아니…난 간 줄 알고.”
“…….”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며. 그런데 없었잖아.”
다 큰 남자의 한탄으로는 조금 웃긴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의 정이 고프고 늘 허덕이던 유비는 주변 사람이 사라지는 경험을 싫어했다. 다리가 풀려서 비틀거리는 유비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그리곤 곧바로 사과한다. 너무 놀라서 쿵쿵 소리를 내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
“그저…주군에게 꽃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
“작약 이 아주 예쁘게 폈더군요.”
“…지금 그거 필 시기가 아닌데…….”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신선은 조심스럽게 꽃을 건넨다. 유비는 코를 훌쩍이며 그걸 받아들였다. 탐스러운 크기의 작약은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릴 것처럼 싱싱했다. 그래도 놀랐잖아. 퉁퉁 부은 목소리에 제갈량은 그저 웃기만 했다. 유비는 병에 장식하겠다고 한다. 제갈량은 마음 가는 대로 하라며 뒤를 따랐다. 깨끗하게 씻은 유리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았다.
“예쁘다.”
“마음에 드시나요.”
“응.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꽃을…….”
“혼자 계시면 쓸쓸하실 거 같아서.”
“…….”
“일어나시는 걸 보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벌써가?”
“가봐야 합니다. 아직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요.”
“…….”
“이 꽃이 시들면 다시 오겠습니다.”
“정말이야?”
“예.”
“알았어. 나 항상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제갈량이 찾아와야 해?”
“물론이죠. 주군.”
제갈량이 아프게 웃었다. 짧은 만남은 인간뿐만 아니라 신선에게도 너무나 유해했다.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몸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애초에 감정이란 것을 내줄 공간이 별로 없는 몸인지라, 이럴 때마다 온몸에 과부하가 걸리곤 했다. 나오지 말라고 하지만 유비는 자꾸 따라 나온다. 그때와 똑같았다. 햇빛을 받으면서 그대로 부서져 내리는 제갈량을 보던 유비는 결국 땅에 주저앉았다. 땅바닥에 작고 짙은 동그라미가 뚝뚝 떨어졌다.
**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선은 질문한다. 하지만 옥새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 꽃은 선계의 물건이니 인간계의 속도로 시들지 않는다. 유비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신선은 내내 앓았다. 옥새 안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여전히 신선계는 평화로웠지만, 얼어버린 심장은 여전히 아프기만 했다.
“전…주군을. 유비 님을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기적인 말이었다. 신선은 항상 곧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옥새가 버그로 여겨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늘이 인연을 내려주었으면 책임을 져야 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넘지 못하는 산을 넘어서라도 이 물음의 답을 찾고 싶었다.
사실 유비가 다시 태어나도 옥새 운용엔 그리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유비가 영원히 산다면 어떨까. 다시 태어난 유비는 유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제갈량은 어려운 고민을 했다. 그저 우승자인 유비의 꿈이 필요한 것뿐이라면 그 일에 자신의 욕심 하나 끼워 넣는 것이 그리 큰일일까 싶었다.
사실 이 결심을 하기 전부터 많은 것을 준비했다. 먼저 도원 관을 봉인했다. 유비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천천히 그것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만이었다. 제갈량은 늘 꽃이 시들면 온다는 말을 남기도 떠났다. 유비는 항상 도원 관에서 기다렸고, 다른 곳은 가지 않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만들어진 세계였으며 꿈속이라고 말해도 충분했다. 처음엔 마을 단위로 그다음은 정원까지. 마지막은 도원 관이었다. 인간의 한정된 삶을 봉인하려면 최대한 작은 공간이 필요했다.
영웅 패의 추억이 깃든 곳. 유비의 오래된 행복이 있는 곳. 모든 사람이 추억을 쌓고 간 곳. 기억이 천천히 지워지면,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유비는 늘 항상 같은 얼굴로 제갈량을 기다렸다. 제갈량은 유비가 하자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다. 어느새 도원관은 조금씩 낡아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된 곳이라고 다들 말한다. 이미 유비와 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제갈량은 자신의 이기심임을 알면서도 매일 번뇌하고 고민한다. 자신이 한 행동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주군은 받아들여 줄까. 하지만 제갈량만 입을 다물면 되는 일이었다. 이젠 버릴 양심조차 없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심장을 찌르는 고통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선계엔 밤이 왔다.
“…….”
별똥별이 내린다. 인간계에선 사람이 죽으면 별똥별이 보인다고 했다. 선한 사람의 영혼을 저 멀리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말했다. 신선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의 눈앞에선 수많은 별이 떨어졌다. 꼭 자신을 꾸짖는 것 같다. 평생 운명이 이끄는 데로 살아왔는데, 원하는 것 한 가지를 했다고 모두가 자신을 책망했다. 이기적으로 살아선 안 되는 몸에 모든 것을 알려준 옥새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감정을 배울 수 없게 해야 했다.
“…주군.”
유비는 항상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반겨준다. 힘들 때마다 도원 관으로 내려가 유비를 찾았다. 그러면 항상 자신을 걱정한다. 수백 수천 번을 같은 말을 하면서 다독여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제갈량을 보며 유비는 매일 같은 말을 했다. 세상이 혼란한 이유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도 제갈량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전…어떻게.”
놓을 수 없는 손이었다. 신선계가 불안한 것은 옥새와 동화된 자신의 감정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모른 척하고 살았다. 하지만 총명한 머리는 자꾸 두 가지 생각을 함께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몸이 아팠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일을 끝낼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일부러 모른 척했다. 옥새에겐 유비의 생과 사를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유비가 살아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의 주군을 속이는 일이었다. 제갈량은 꼬박 백 년을 고민했다. 두 번째 별똥별이 내리던 날 그는 이별을 준비했다. 너무 총명하고 공정해서 끝까지 이기적이지도 못했다.
“주군.”
“…제갈량?”
“가셔야 합니다.”
“어딜? 우리 놀러 가?”
“…….”
“왜 그래. 다들 소원을 빌지 않아? 그래서 힘들어?”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
“다음엔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꽃이 시든다. 그리움이 녹아내린다. 도원 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유비를 이끈다. 파랗게 내려앉은 어둠은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유비는 주변을 둘러보다 하늘을 올려보았다.
“…….”
“별똥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 주군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건…….”
“제가 훔친 주군의 모든 기억입니다. 이렇게 많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제갈량. 왜 그래.”
“이제 가시던 길을 다시 걸어가셔야 합니다.”
“…….”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 이기심을 용서해 주세요.”
“…….”
유비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조금 떨어져서 서 있었다. 서서의 화단쯤일까. 그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량을 불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도원 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아는 제갈량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군을 속였습니다.”
“…뭐?”
“주군을 보낼 수 없어서 도원관을 봉인하고, 떠나야할 영혼을 봍잡았습니다.”
“…….”
“하지만 그것이 제 이기심임을 인정하는데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이제야 용서를 빌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은 하늘 뿐. 전 어리석게도 옥새를 가지고 주군에게 신이 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왜.”
“…….”
제갈량이 땅에 엎드려서 울었다. 소리 없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방울마다 꽃을 피웠다. 유비는 여전히 도원관 앞에 서 있었다.
“바보같이.”
“…….”
“내가 그걸 왜 몰랐겠어.”
“…….”
“여기에 남아있는 것은 내가 원한 일인데, 왜 제갈량이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
“제갈량.”
“…….”
“행복해지렴.”
“…….”
“응? 나야말로 제갈량에게 이기적인 사람일 뿐인걸.”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본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봉인된 곳의 경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기에 제갈량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늘을 하얗게 수놓던 것이 하나둘 사라졌다. 파란 어둠이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