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히삼/제갈유비] 창공의 전기(蒼空之傳記) 018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유비와 제갈량 / 조조와 사마의 / 손책과 주유가 각각 궁의 주인과 신선으로 나옵니다.
제갈유비 연성으로 시작했지만, 둘이 만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습니다.
동양 AU 및 설정 날조가 항상 함께합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지금까지 같이 있었으니, 주군께서 쉽게 주변을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
“물론 지금 하려는 것이 완벽한 방법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도움을 되리라 생각합니다.”
“뭘…할 건데?”
“글쎄요.”
“제갈랴앙.”
“인간의 육신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주술입니다.”
역시 제갈량은 금방 답을 들고 온다. 물론 이 방법을 제시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원래는 주군의 몸이 회복되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직 선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게다가 응룡의 힘은 아직 제대로 나타나지조차 않았다. 그런 몸이 억지로 움직이는 것만큼 나쁜 일도 없었다. 물론 유비는 그랬지만.
“이…렇게?”
“예. 가만히 계세요.”
“…….”
“잡아먹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눈을 감고 명상이라도 하시면 금방 끝날 겁니다.”
“뭐…으악!”
“움직이시면 글자가 흔들리니 제발 가만히. 의연하게 행동하세요.”
“응…으응.”
“그럼.”
제갈량은 가는 붓을 유비의 등에 댄다. 붓끝이 길고 곧게 뻗어있었다. 그리고 축축했다. 제갈량은 손끝에 힘을 주고 유비의 목부터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작은 글씨인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모양 같기도 했다. 목에서부터 시작한 글씨는 등을 타고 내려간다. 척추를 따라 곧게 이어지는 글씨는 움푹 파인 곳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손끝이 닿는 것도 아니고, 고작 붓인데 왜 이렇게 민망한지 알 수 없었다. 유비는 볼을 꾹꾹 누르고 싶었지만,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제갈량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붓을 움직이는 데 집중한다. 꼭 자신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원래는…….”
“어…응! 나 듣고 있어.”
“거의 끝났으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
“원래는 몸이 회복되신 후 응룡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정식으로 새길 예정이었지만…당장 필요한 듯하여 약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기운을…눌러?”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늘려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게…어떻게 가능한 거야?”
“제가 누군가요. 선계 최고 신선입니다.”
“…….”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려고 합니다.”
“또 제갈량한테 부담이 가는 거지?”
“네.”
“…….”
“맞습니다. 주군.”
이번엔 무슨 생각인지 바로 대답을 해준다. 유비는 갑자기 직설적인 대답을 듣자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늘 찬찬히 생각해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제갈량은 직접적인 대답을 주기보단 유비가 스스로 생각하긴 원하곤 했다. 주군과 신선 관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기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런 제갈량이 단번에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
“제가 질 수 있는 한계를 넘기 전에 주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길 빌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해.”
“맞습니다. 제가 너무합니다.”
“…….”
“주근을 기다리면서 평생을 이곳에서 사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군이 돌아오셨는데, 제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
“잠시만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제갈량…….”
“보채지도 마시고요.”
“…….”
“정신이 흔들리면 술은 금방 파괴됩니다.”
“…알았어.”
제갈량은 글자가 시작되는 곳에 손을 댄다. 맨살에 찰싹 달라붙는 손가락은 유난히 서늘했다. 유비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괜히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제갈량이 치료해주는 것이 한 두 번도 아닌데, 오늘따라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던 제갈량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선계의 위대한 힘이여 이곳으로 오라.”
“…….”
“나를 바꾸어 주군으로 하여금 빛나게 하라.”
그 뒤는 잘 들리지 않았다. 순간 아득하게 정신이 멀어진다. 그대로 발밑이 꺼지는 것 같았다. 유비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제갈량의 품속에 안겨있었다. 유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해주던 제갈량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갈량?”
“예, 주군.”
“끝난 거야?”
“물론이죠. 잠깐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
“무사히 마무리된 것 같으니 한숨 돌렸군요. 제발 제 눈을 피해 험하게 움직이지만 않으신다면 쉬이 회복될 것입니다.”
“아까 무슨 일을 한 거야?”
“신선이 할 일이죠?”
“그런 대답 말고…….”
“…….”
“응?”
“주군께서 호기심이 이리도 많으시니.”
“다 제갈량 덕분이야.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잖아.”
“굳이 아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
“제힘을 빌어 주군 몸을 보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제가 직접 주군에게 옮겨갈 수 없으니 그 중간에 간단한 다리를 만들어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내가 폭주라도 하면”
“…….”
“제갈량이 다치는 거 아냐?”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
“전 선계 최고니까요. 곧 주군이 힘도 모두 찾아드릴 겁니다.”
“…….”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어리광을 부리셔도 괜찮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아이를 돌본 경험이 없어서 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제갈량. 난…정말.”
“…….”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주군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저와 궁에 큰 힘이 됩니다. 그런 분께서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시는 것은 당치 않습니다.”
“…….”
“어차피 저희는 주군이 없었다면 사라질 운명.”
“…….”
“그런 제게 다시금 생명을 주셨으니까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저도 좀 더 눈이 맑았어야 했습니다.”
“보고 싶었어.”
“저도 하루를 천년처럼 살면서…늘 주군을 기다렸습니다.”
“…….”
그제야 진심이 닿는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은 늘 굽이치는 강물처럼 돌고 돌아 간신히 만나곤 했다. 군주와 신선의 성격이 다른 것이 이유일까. 아니면 그저 짐작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둘의 머릿속을 알 길이 없었지만, 같이 있으면 조금씩 얼어붙어 있던 감정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길게 늘어지는 유비의 말을 하나하나 받아준다. 하루는 천년처럼 살던 둘이 간신히 만나자. 이제야 시간이 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주군. 사마의입니다.”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 들어오게.”
사마의는 곧장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잠시 기다린다. 뭔가 치우는 소리와 함께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방에 어린 궁주가 같이 있는 듯싶었다. 하긴 그렇게 귀애하는 아이를 잠시라도 떼놓긴 힘들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늘 바쁜 아버지에게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다. 그래도 태오 장군이 있을 땐 조금 투정을 덜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 번씩 이렇게 군주의 혼을 쏙 빼놓곤 했다.
가만히 서 있으니 안쪽부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사마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문이 열리고, 작은 아이가 톡 굴러 나온다. 신선은 뒤로 한걸음 물러선 채 아이가 바깥으로 편히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작은 아이는 안쪽을 들여다보면서 까르르 웃는다. 봉황궁에 생기가 도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난 그럼 태오 아저씨한테 가서 놀 거예요?”
“그래. 그러렴.”
“나중에 찾으러 오셔야 해요?”
“알았다. 알았어.”
“사마의 아저씨?”
“예, 궁주님.”
사마의는 자신의 허리춤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눈앞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옷자락이 꼭 금붕어 꼬리 같았다. 사마의의 주군이 직접 곱고 예쁜 옷만 입히고, 좋은 신발만 신겨서 소중하게 키운 아이는 사랑받은 티가 난다. 그런 아이를 보고 예뻐 죽으려 하는 어른이 둘. 미묘한 눈으로 보는 신선이 하나. 각자 다른 생각을 속으로 숨긴 채 아이를 대한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날카롭다. 아무리 겉으로 잘하는 것처럼 굴어도 금방 그 속을 짚어내고 만다. 사마의가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은 군주도 태오 장군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곱게 자라고 있는 작은 아이. 바로 초선이었다.
“아저씨도 아버지한테 볼일이 있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랬구나.”
“빨리 말을 마치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일하실 땐 얌전히 있어야 하니까요. 전 태오 아저씨한테 가서 놀 거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네, 궁주님.”
“아.”
초선은 금방 달려나가려다가 갑자기 멈춰 선다. 주인을 따르던 옷자락이 공중에서 하늘하늘 내려앉는다. 그런 옷자락의 끝을 사마의가 가만히 바라본다. 왕윤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사마의가 평생 보지 못했을 광경이기도 했다.
“사마의 아저씨.”
“네, 궁주마마.”
왕윤은 초선에게 사마의를 신선이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모든 말을 잘 듣는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입에 붙었는지. 태오도 사마의도 초선에겐 모두 아저씨일 뿐이었다. 사마의는 호칭에 연연하지 않으니 초선이 무슨 말로 불러도 그냥저냥 받아주곤 했다.
“태오 아저씨 어디 있는 줄 알아요?”
“아…그건.”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급히 오느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음. 괜찮아요! 지금부터 내가 찾아보면 되니까!”
그럼 나중에 봐요!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다. 궁에서 곱게 자라는 작은 아이는 씩씩하게 손을 흔들면서 멀어진다. 딱히 뒤를 돌아볼 것 같진 않지만 사마의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그리곤 곧장 몸을 돌렸다. 주군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안 될 일. 급하게 안으로 들어간다.
“주군.”
“내가 자네를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아이를 빨리 내보낸다는 것이…….”
왕윤은 흐트러진 서적을 정리하면서 허허 웃기만 한다. 하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곱게 키우고 있으니 도저히 엄하게 대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군주가 자식은 오만방자하게 키운다는 것은 아니었다. 사마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을 대신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급히 나를 찾았는가.”
“중요한 일입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당장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
“앉지. 차라도 좀 내오라고 할까?”
“아닙니다.”
“좋아.”
왕윤은 늘 자애롭다. 당당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굽어살핀다. 가장 힘이 강한 신수가 그를 비호하니 아무도 감히 흠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사마의도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상향과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군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응룡궁의 군주가 돌아왔습니다.”
“뭐라.”
“다 죽어가던 서쪽 대나무 숲이 완전히 살아났더군요. 아직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추진 않았지만, 아마 확실할 것입니다.”
“하긴 그곳은 군주가 돌아와야만 제 생명을 찾을 수 있는 곳이지.”
“제갈량이 언제부터 움직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축하할 일이군.”
“예?”
“왜 그렇게 놀라지?”
“아닙니다. 전 그저…….”
“그렇게 고민하던 일이 해결된 것이 아닌가.”
“…….”
“이제야 균형이 맞겠어. 그렇게 되면 태오나 자네에게도 부담이 덜어지니 좋은 일 아닌가.”
“…….”
“물론 가장 축하받아야 할 사람은 응룡 궁이다만.”
“…네.”
“…….”
“그렇습니다. 좋은 일이죠.”
사마의의 대답은 영 성의가 없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먹는 것처럼 내뱉더니 한숨을 쉬고 만다. 사마의는 자신의 군주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선계 최고 신선이 모셔야 할 군주는 늘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왔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왕윤은 그런 곳에 뜻을 두지 않은 인물이었다. 너무 강해서 오히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사마의는 속으로 숨겨둔 다른 마음이 보이지 않게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태오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늘 힘든 일에 앞서 나서주었던 걸 내가 기억하네.”
“…….”
“우리도 한숨 돌릴 수 있겠어.”
“…아직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불안합니다.”
“…….”
“제갈량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감히 군주를 꾸며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군.”
“…예?”
왕윤의 대답은 빨랐다. 사마의는 이런 상황을 염두 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드물게 반문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신선이 낯선지 왕윤은 웃고 만다. 언제나 진중하게 자기가 할 일만을 다 하던 신선이었는데,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저럴 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아닙니다. 그저…….”
“답이야 간단한 것 아닌가. 내가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예? 주군…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 군주가 돌아왔다는데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춰야지.”
“…….”
왕윤이 이렇게 나오리라곤 정말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주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것. 사마의는 그 결정을 꺾을만한 힘도 명분도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나 태오 장군을 보내지 않을까 했다. 그랬기에 이런 결정이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따르겠습니다.”
“…….”
“주군?”
“아니야. 혼자 갈 것이니 따르지 마라. 사마의.”
“…….”
“아직 한창 예민할 시기가 아닌가.”
“그야…….”
“굳이 신선까지 대동하고 가서 응룡궁의 심기를 긁을 필요는 없지.”
“주군!”
“괜찮아. 무슨 일이 있겠는가.”
“…….”
물론 저 말이 맞긴 하다. 그 누가 자신의 궁을 찾아온 군주를 해하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제갈량은 그런 식의 얕은수를 쓸 작자가 아니었다. 한다면 오히려 전면전이나 뒤로 움직이는 방법을 쓰는 편이 나았다. 사마의는 자신이 따라갈 수 있는 명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왕윤의 결정을 반박할 수 없었다. 눈을 뜬 채로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태오 장군이나 여포와 함께 가시지요.”
“괜찮다니까.”
“주군.”
“오히려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불안함을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
“제갈량이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자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하오나…….”
“금방 다녀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의지가 확고한데, 더는 말을 거들 수 없었다. 사마의는 일단 한걸음 물러선다. 짧은 대화가 끝난다. 사마의는 얻는 것도 없이 끝난 이 상황을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적어도 셋 중 하나는 대동한 채 응룡 궁으로 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군주 혼자서 움직인다니. 이렇게 되자 예의나 체면을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판이 더 신경 쓰였다.
‘장각은 한동안 이곳에 오지 않을 테고.’
다른 것을 뒤에 붙인다 하더라도 눈치 챌 공산이 크다. 사마의의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차라리 태오 장군이 같이 간다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를 통해 무엇인가 보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혼자 가겠다는 말은 응룡궁과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물론 왕윤이 쉽게 다른 생각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말을 하지만 봉황 궁을 이만큼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마의는 좀 더 초조해졌다.
“술시(戌時) 정도면 돌아올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말라.”
“알겠습니다.”
“태오에겐 말을 하고 가야겠지.”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예. 가는 길이 머실 텐데…….”
“…….”
“신선 사마의.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겠는가.”
“…….”
“자네의 충성심에 늘 고맙게 생각하네.”
“예.”
“그럼 난 의복을 갖춘 후 바로 출발할 것이니 초선이와 태오에게 말을 전해주길 바라네.”
“예, 주군.”
“그래. 나가보도록 하라.”
사마의는 조용히 일어선다. 이곳을 나가면 왕윤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계속 고집을 피워봤자 의심만 살 뿐이었다. 이럴 땐 불안하지 만 물러서야 했다. 왕윤이 부탁한 일도 있으니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한다.
‘…태오 장군이라.’
사마의는 늘 태오를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물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그리 관심이 없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신수를 다룰 수 없는 인간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뭐, 뛰어난 장군이긴 하다. 게다가 그 몸은 인간이라고 하지만 어느 정도 선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육체로 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태오 장군의 그 끝 모를 충성심이 언젠간 자신에게 휘두를 칼이 될 것 같았다.
“…….”
걸음이 빨라질수록 표정이 사라진다. 태오 장군이 기거하는 곳은 약간 떨어져 있었다. 궁주도 그곳에 있을 터이니 한 번에 이야기를 전하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보통 때는 잘 찾지 않는 장군의 처소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기회로 삼기로 한다. 애초에 태오와 왕윤이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때로 장군의 처소에서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따로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신선은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장군의 처소에 드나들지 않는다. 애초에 충성을 맹세할 대상은 군주였기에 그 밑에 있는 사람에게 따로 만남을 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군주에 대한 불복과도 같았다. 때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홀로 응룡 군주를 만나러 가는 주군에 관한 의아함을 잠시 잡어두기로 했다.
“태오 장군.”
“…….”
“태오 장군. 사마의입니다.”
“…….”
“태…….”
“사마의 아저씨!”
“궁주님. 여기 계셨군요.”
“태오 아저씨는 왜 찾아요?”
“그게…….”
“아저씨. 사마의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태오 아저씨!”
“…….”
늘 발랄한 작은 궁주는 오늘도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다. 사마의는 궁주가 이끄는 대로 발을 옮긴다. 물론 정식 예법에 따르자면 태오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궁주가 옷소매를 잡아당기니 어쩔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태오에게 말을 건네도 되지 않으니 좋다고 해야 할까. 생각보다 검소한 건물을 바라보는 사마의의 눈은 점점 더 짙어졌다.
“…….”
“…아.”
“…이런.”
“잠시 나가 있을까요?”
“아닐세.”
“…….”
늘 근엄하고 덤덤하던 태오 장군이 드물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궁주가 무엇을 하자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머리와 손에 비단 끈이 잔뜩 묶여 있었다. 어린 또래가 없는 궁에서 심심했던 모양이리라. 태오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푼다. 사마의는 혹여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린 궁주는 뭐가 좋은지 이번엔 리본 푸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바짝 붙어있었다.
“초선이 심심하다고 해서…….”
“…….”
애써 변명을 꾸며낸다. 신선은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겨우겨우 괴상한 모습이 정리된다. 태오는 사마의에세 자리를 권한다. 그제야 조금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되었다.
“이런 곳까지 어인 일인가.”
“주군께서 하명하신 일이 있어서 들렸습니다.”
“하긴…뭔가 일이 있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올 일이 없지.”
“…….”
“무슨 일이지?”
“주군께서 방금 응룡궁으로 출타하셨습니다.”
“…뭐? 왜 나한테는 알리지 않았는가. 여포는?”
“신수는 두고 가셨습니다. 저와 태오장군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으신 채 홀로 응룡 군주를 만나러 가신다는 말을 하셨죠.”
“…….”
“주군께서 어떤 생각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이럴 때에.”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재차 간청을 드렸으나, 워낙 뜻이 확고하셔서 더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술시(戌時) 정도면 돌아올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외출하셨어요?”
“예, 궁주님.”
“…나도 데려가지.”
“일하러 가셨으니까요.”
“…….”
어린아이는 이 상황이 그저 섭섭한 모양이었다. 초선이 잠시 후원에 나가 있는 사이 태오와 사마의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둘 다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태오는 자신이 호위로 따라나서지 못한 것에 대해 약간 불만이 있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사마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둘이 맘대로 궁을 비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군주가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신선과 호위 병력이 궁을 지켜야 했다.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따라나설 수도 없는 일이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아무 일이 없으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끝없이 걱정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군주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결계 쪽도 정리를 해야 하고…….”
“결계라…….”
“응룡궁이 살아났습니다. 당연한 절차입니다.”
“알았네.”
“네, 그럼.”
“…….”
태오는 곧 생각에 잠긴 채 사마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모습이 익숙하기에 사마의도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 다행히 궁주를 만나진 않았다. 그랬다면 또 한바탕 잡혀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 뻔했다. 사마의는 장각을 한동안 풀어둔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럴 때 불러들여야 하는데. 하긴 응룡 군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정말 상상이 맞지 않는 종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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