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100분/왕윤태오] 정장, 일기장, 거짓말
+) NOTICE
레전드 히어로 삼국전 2차 연성입니다.
본편 9~11화 중요 네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윤 짝사랑하는 태오가 고집이 매우 셉니다
적당한 망상과 설정 붕괴가 언제나 함께 합니다 ㅇㅅㅇ)9
write. 환월
“그게 무슨 말이니?”
“…….”
“태오야. 잠시만. 잠시만 이야기 좀 하자.”
“…….”
“괜찮지?”
“…….”
키만 멀쑥하게 큰 아이는 입이 붙었는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그 앞에 있는 남자는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며 아이를 달랜다. 나이 차이를 따져 봐도 족히 십년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둘은 이질적이기만 했다.
“일단 들어가자.”
“저 지금 아저씨한테 인생 상담받으러 온 거 아니에요.”
“…….”
“내 결정을 통보하러 온 거지. 그런 거 아니니까 저 설득 할 생각은 그만두세요.”
“태오야.”
“…….”
“커피 괜찮지?”
“…….”
“일단 좀…여기서 서서 이래 봤자 되는 일이 아니잖아.”
“…….”
눈앞에 서 있는 아이는 키만 불쑥 자란 콩나물 같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컸을까. 시선이 아슬아슬하게 마주치게 된 건 언제부터지. 왕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얗게 뜬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간신히 눈썹을 가리며 표정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당돌한 말투와 달리 아이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가자.”
“…….”
“여기서 나 따라 안가면 다시는 나 볼 생각이 없는 줄 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
“어서.”
왕윤이 짐짓 엄하게 말한다. 교복 위에 코트에 목도리까지 한 녀석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서렸다가 다시 사라졌다. 왕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먼저 돌아섰다. 조금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내내 바라보던 녀석은 입술을 쭉 내린 채 따라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반항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럴 땐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
겨울은 해가 금방 진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그것도 모자라서 금방 눈이라도 쏟을 것 같았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우중충했다. 그런 하늘 아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 둘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나무는 이미 나뭇잎이 죄다 떨어져서 황량하기만 하다. 발끝에 툭툭 차이는 낙엽은 바짝 말라서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뒤따라가던 아이는 괜히 심술을 부리면서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을 찼다. 바삭. 거리에서 며칠 동안 굴러다닌 낙엽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
아이는 제풀에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꼭 이럴 때만 소리가 시끄럽게 나곤 한다. 한마디 하면서 방문을 닫았는데 쾅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았다. 하얗게 들뜬 얼굴이 앞서가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조용히 한숨을 쉰 아이는 급하게 왕윤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심장이 덜컹 덜어지는 아이는 혼자서 사고를 열심히 치곤 했다.
**
“커피 괜찮아?”
“…….”
“태오야.”
“…네.”
“그럼 알아서 시킨다?”
“…….”
당장 눈을 뿌릴 것 같은 날씨가 영 못 미더워서 억지로 카페에 끌고 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그리고 그런 둘을 기다렸다는 듯 눈이 퍼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뚱하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는 그런 상황이 오거나 말거나 그저 구석에 자리 잡고 의자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왕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자꾸 한숨을 쉬었다.
“눈이 오네.”
“…….”
“태오야.”
“…….”
“일단 시키고 와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
커다란 눈송이가 온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펑펑 내리기 시작하자 간신히 빛이 들던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빽빽하게 낀 두꺼운 구름이 짧은 해를 가렸다. 태오는 그런 광경을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다. 왕윤이 알아채지 못하게 바깥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점점 눈발이 굵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꼭 이 날씨가 자기 처지인 것 같았다.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꼼꼼히 두른 채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봤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가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린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면 어두워졌지, 날씨가 갤 것 같지는 않았다. 왜 하필 이런 날 날씨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 울적해졌다. 차라리 날이라도 맑았으면 생전 처음 왕윤에게 떼를 써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 일단 좀 마시고.”
“…….”
“태오야. 우리 천천히 이야기 좀 하자.”
“그…….”
“아까 한 말이 사실이야?”
“…….”
“어렸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
“가끔 이런 널 볼 때마다 늦은 사춘기가 온 건지 걱정이 된단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왜.”
“…제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정했을 뿐입니다.”
“…….”
“집안에서 정해준 미래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리고…….”
“태오야.”
왕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태오는 그런 목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납처럼 무거워서 한번 들으면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어릴 때 들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데 태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눈치를 보곤 했다.
“난…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내가 막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
“너랑 내가 가족도 피가 섞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하겠니.”
“…….”
“그런데 말이다.”
“…….”
“그저 내 뒤를 쫓아서 그러는 거라면 좀 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거야.”
“아저씨…….”
“넌 어릴 때랑 하나도 안 변했어.”
“아저씨도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
“왜 자꾸 저한테 거짓말하세요.”
“뭐?”
왕윤이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찰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앉은 녀석은 당돌하게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저렇게 뿔이 났는지 알아봐야 했다. 왕윤은 속으로 불안함을 꾹꾹 눌렀다. 안 그러던 아이가 갑자기 이러는 건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경찰이고 누군가를 상담해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슬아슬한 녀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
“잘 참았다. 이제 다 괜찮다. 그렇게 말 하셨잖아요.”
“그거야…….”
“그때부터 아저씨만 봤어요.”
“…….”
“집에서 검사해라. 판사를 해라. 말이 많았는데,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차피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아저씨랑 같은 직업을 가져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유학이니 뭐니. 안 하겠다 하고 쫓겨났고요.”
“…넌 정말 어릴 때랑 똑같냐.”
“부모님이 유산 미리 떼어 줄 테니 알아서 살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랑 다른 친척분들한테도 말이 들어가서 이젠 다른 일도 할 수 없을 거고요.”
“…….”
“아저씨한테 책임지라고 하고 싶었어요,”
“…….”
“맞잖아요. 아저씨 때문에 경찰이 될 거니까. 기다려 달라고.”
“…….”
“선배로 부를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려 했는데…아저씨는 자꾸 나보고 어리다고만 하잖아요.”
“태오야.”
“아저씨는 내가 후배가 되는 것이 싫어요?”
“…….”
당돌한 말이었다. 물론 태오는 똑똑해서 왕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왕윤과 친해지면서 태오에게 뭔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얻어맞았는지 벌건 뺨을 달고 찾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에 전화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끊어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사춘기일 거라고. 어린 날의 치기 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싫으면 지금 이야기해요. 나 그만둘 거니까.”
“네 미래를 이렇게 정하면 안 돼.”
“왜 안 되는 거죠?”
“…….”
“집안의 꼭두각시처럼 공부해서, 검사가 되고.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휘둘리는 건 더 싫으니까요. 어차피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아저씨랑 같이 악을 없애는 편이 나아요.”
“…….”
물론 경찰이 되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지만 태오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굴었다. 왕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런 어린 진심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까. 그저 안 된다고 다시 생각해보라며 밀어내는 것만 괜찮은 방법일까.
왕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의도적으로 못 본 척 한 것도 많았다. 그저 어릴 적 힘들었을 때 기억이 남아 자신을 잘 따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태오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왕윤의 얼굴에 슬쩍 그늘이 졌다.
“난 계속 아저씨한테 말하고 있었어요.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것처럼 생각했고.”
“…….”
“집안에서 나한테 정해준 미래를 박차고 나올 때도 아저씨를 생각했어요,”
“…….”
“아저씨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참았는데…자꾸.”
“태오야. 나 좀 봐라.”
“…….”
“응?”
“…….”
벌겋게 뜬 눈이 보인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왕윤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태오는 여전히 두 손으로 종이컵을 꽉 쥔 채 손끝으로 긁어댔다.
“난 솔직히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
“내가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고맙지만, 경찰은 사사로운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되는 직업이야.”
“…….”
“만약 지금의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채 경찰이 되었다고 하자.”
“…….”
“아주 불운하게. 나와 범인 둘 중의 한 사람의 목숨만 살릴 수 있어. 그러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야.”
“날 선택하면 안 돼.”
“…….”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 모습을 모른 척했다. 심장에 툭툭 박히는 아픈 말을 이어갈수록 아이의 얼굴의 웃음이 사라진다. 금방이라도 푹 꺾일 것 같은 모습으로 울지도 못하고, 왕윤이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달프게 바라보았다.
“경찰이란 그런 거야.”
“…….”
“네가 날 좋아하는 만큼 네가 지켜야 할 사람을 생각해야 해. 그리고 날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고.”
“…….”
“근데 지금의 넌 그게 안 될 거 같아서 그러는 거야.”
“…….”
“네가 소중해서 그런다. 내가 구해냈고, 지금까지 자라는 것을 봤어.”
“…….”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태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만 꾹꾹 삼켰다. 왕윤은 저 아이에게 저렇게 깊은 슬픔을 받아주기 힘들었다. 학교 쪽으로 지나쳐 갈 때 태오를 몇 번 본 적 있었다. 친구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냉한 얼굴을 하던 녀석은 자신 앞에선 다시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웃었다. 그런 녀석을 언젠간 괜찮아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금까지 방치한 것은 자신이었다. 조금은 책임이 있어서 지금이라도 단호하게 밀어내야 했다. 아이는 늘 사랑에 굶주려서 허덕였다. 그래서 더 왕윤을 놓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왕윤은 자신의 결혼식에 왔던 태오를 기억했다.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하얗게 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농담 삼아 부케를 네가 받으라고 했었다. 순식간에 지나친 얼굴이었지만, 태오 얼굴에서 진심을 보았다. 그리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결혼 축하드려요. 아저씨. 낮고 어린 목소리 끝에 다른 종류의 애정이 묻어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니 알아도 모른 척했었다. 왕윤은 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건가요?”
“물론이지.”
“…….”
“넌 아직 어려. 나한텐 꼬맹이야.”
“…그렇지만 지금 떼를 쓰면 다 컸다고 혼낼 거죠. 다 알아요.”
“들켰나? 하하하.”
“아저씨는 농담도 못 하고, 거짓말도 못 하고.”
“…….”
“그래서 좋아해요.”
“…….”
“나중에 봐요. 커피 잘 마셨어요.”
“…그래.”
태오는 벌떡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약간 풀린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속으로 숨겨버린 것 같기도 했다. 왕윤은 굳이 따라나서지 않았다 저 아이가 언제 저만큼 컸지. 너무 어릴 때 봐서 그런지 꼭 자기 자식같이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까지 말했으니 아이는 알아듣겠지. 저 녀석이 고집은 좀 세지만 똑똑하니까. 너무 심한 말만 골라 한 것 같았지만, 한 번쯤은 이래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왕윤은 이례적으로 경찰대에 엄청난 성석으로 수석 입학한 녀석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멀끔하게 경찰 제복을 입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순간, 깨달았다. 태오 저 녀석은 아직도 하나도 철이 들지 않았다.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뛸 거라면 차라리 왕윤이 거둬서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가르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기분이었지만, 이렇게 좋은 날 굳이 저 녀석에게 한마디 엄한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
“…….”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계절이 몇 번이나 돌아서 다시 겨울이 왔다. 텅 비어버린 심장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 심장을 잡고 그대로 뜯어낸 것 같았다. 그 날처럼 눈이 왔다. 남자는 품 안에 안은 꽃이 뭉그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고쳐 안았다. 바람이 차갑게 온몸을 파고들었다.
“선배.”
떠난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몇 번이나 들렸다. 한 번쯤은 대답을 해줄만도 한데, 이 세상에 듣고 싶은 목소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조는 한참 동안 죽은 것처럼 살았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하고, 심장이 뜯기는 것 같아 가슴이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주먹으로 두들겼다. 하지만 이 고통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선배는 이걸 유비한테 주라고 하셨죠.”
한 손으론 국화꽃을 들고, 다른 손엔 칠보검을 들고 있었다. 꼭 긴 어둠을 헤쳐 나온 것처럼 옛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혹시 병이 걸린 건가 싶어 병원도 여러 번 찾아갔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고통은 조조를 파고들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다 보면 기억이 한 조각씩 떠오르곤 했다. 조조는 그럴 때마다 급하게 일기장을 찾았다. 아니 일기장으로 할 수 없을 만큼 마음 가는 대로 쓰는 공책이었다. 하나씩 적다 보면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일기장이 한 권이 되고 다시 두 권이 되었다. 같은 말을 여섯 번쯤 반복하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연속으로 적혀있기도 했다. 조조는 혼란한 기억 속에서 왕윤을 찾았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서랍 속에 들어있는 칠보검 생각이 났다.
“그거…어디 있더라.”
조조는 미친 사람처럼 짐을 뒤졌다. 어디다 넣어놨는지. 손톱이 뚝 부러질 정도로 찾았다. 겨우 손에 쥔 칠보검은 바뀐 것이 없는데, 그저 주인만 자리에 없었다. 가만히 검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왕윤은 이걸 유비에게 전해달라고 했고. 같이 싸우라고 말했다.
어째서?
조조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칠보검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자꾸 저릿하게 아파졌다. 잉크가 여기저기 번진 일기장엔 간신히 찾아낸 기억이 가득한데, 거짓말처럼 선배만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일기장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기억과 과거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선배는 이걸 유비에게 전해달라 하셨지만, 그러지 않으려고요.”
조조는 왕윤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아프게 웃었다. 조조는 왕윤의 장례식도. 추모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다들 어느 정도 이해는 하는 눈치였지만, 조조 앞에서 감히 왕윤의 일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하던 걸 모두 거절하고 겨우겨우 찾아왔다. 교복을 입은 채 목도리를 둘둘 말고 왕윤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제 훌쩍 커서 상복을 입고 왕윤을 찾아왔다.
“저 여전히 말 안 듣죠?”
그럴 거로 생각해요. 조조는 이제야 왕윤의 이름을 똑바로 바라본다. 어떻게 된 건지 좀 더 알아봐야 했다. 선배가 왜 죽었는지. 나는 뭘 했는지. 그리고 유비는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칠보검을 내놓지 않고 싶었다. 그래도 이건 주인에게 돌아가야 했다. 애초에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내놓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제야 선배가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조조는 국화 한 다발을 내려놓았다. 내년에 또 올게요. 쓸쓸한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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